신앙의 중심

몽달이 생각  |   2010. 3. 18. 14:20

오늘의 말씀 (요한 5,31-47)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나눔거리 

예수님을 믿나요? 하느님을 믿나요? 그리고 성령은 믿고 있나요?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은 교리적으로도 얼마나 어려운지는 교회의 대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노의 일화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느날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적인 해석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바닷가에 쉬러 갔는데 해변가에서 아이들이 빈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해변가의 얕은 웅덩이를 만들어 거기에 퍼 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평생 그렇게 해도 못할 것이라..."며 얘기하니 그 아이는 버릇없이 손가락질 하면서 "당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보다 이 일이 더 쉽지요." 하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는 커녕 우리가 믿는 주체에 대한 명확한 대상이 없이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를 하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심을 깊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더 도움은 되겠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에 잘 맞춰 살아가고 선행을 베풀고 있는 그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이 존재하고 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모범입니다. 자신의 곤란과 고통으로 자신의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고 그 신앙의 중심은 항상 내가 아닌 하느님이셔야 합니다. 

어려울 수록 자신은 자신을 중심에 놓기 쉽습니다. 상황의 불리함속에서도 자신을 합리화할려고 하고 그렇게 합리화 한 후에 성경의 말씀으로 끼워맞추는 합리화의 신앙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려울 수록 힘들수록 그리고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정말로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기도한다면 그리고 기 기도의 응답을 자신의 욕심이나 편견없이 잘 듣는 집중력을 가진다면 하느님이 주시는 뜻을 예수님처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문

일이 잘못되었을 때 왜 그렇게 했을까 후회하는 것은 그 일을 자기중심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하느님 중심에서 보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할 때는 진정으로 죄의식을 느끼고 영혼의 흠집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백할 내용은 '가'인데 사제로 하여금 '나'로 알아듣게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 고백이다. 
영혼의 흠집을 바로잡는 영적 변화가 일어나야 올바른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이싿.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잘못을 저지른다. 
고통의 한가운데,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는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도 나무 뒤에 있는 그림자만 보일 뿐 아름다운 꽃과 잎을 틔워내는 은총은 보지 못하기 쉽다. 

"마음의 치유와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집착 때문입니다." 

김웅렬 신부님 (토마스 데 아퀴노) 의 품 너른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