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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25 사랑은 고통 - 닐 기유메트 (1)
  2. 2010/03/21 틱장애우와 핸드폰 통화하는 여인
  3. 2010/03/18 신앙의 중심

사랑은 고통 - 닐 기유메트

사람들 생각 2010/03/25 12:46
참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하나가 바람에 실려 언덕 꼭대기끼지 날아갔다. 도토리는 거기 누워 태양이 비추어 주는 동안 기분 좋게 햇볕을 쬐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양이 그에게 말했다.

photo from http://blog.ohmynews.com/goodi/


"귀여운 도토리야. 네가 아름다운 참나무로 성장하는 걸 내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아니?"

"해님은 지금 이대로의 저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도토리가 샐쭉해서 물었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고말고. 하지만 네 전부를 사랑하기도 한단다."

태양이 대답했다. 도토리는 어러둥절하여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태양은 망설였다. 도토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진실을 말해야 했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야. 케케묵은(코니) 소리 같지만, 나는 현재의 네 도토리다움(에이코니티)을 사랑한단다."

태양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해서 말장난을 곁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너의 보다 깊은 자아도 사랑한단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도토리가 물었다.

"그건 네 안에 감춰져 있는 잠재력인데. 작긴 해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란다. '참나무다움'이라고나 할까."

"음, 그게…."

그는 태양의 말을 곰곰 생각하느라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때는 토라진 기가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제가 참나무다움을 발전시키지 않더라도 절 사랑해 주실건가요?"

태양이 대답했다.

"아무렴 하지만 사랑할 것이 많지는 않을 거야. 그냥 도토리로 있다면 말이야. 반면 네가 참나무가 되는 데 동의해 준다면 내가 사랑할 것이 엄청나게 많을 거야. 내 말뜻 알겠니?"

도토리는 이해는 갔지만 어렴풋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 문제에 관한 한 도토리로 남아 있어서는 별반 재미있을 게 없었다. '결국 한 치밖에 안 되는 키로 뭘 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언제고 지나가는 다람쥐가 주워서 녹초를 만들거나 캄캄한 굴 속에 감춰 버릴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모든 걸 잃게 돼.' 도토리의 생각이었다. 그가 말했다.

"좋아요, 해님. 기꺼이 참나무가 되도록 힘써 볼 게요. 하지만 아프지 않을까요?"

태양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시인했다.

"아마 아플 거야. 얼마간은 특히 처음엔 더 그렇겠지, 너도 알겠지만, 그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도토리는 겪어야 할 고통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싹 바뀌었다.

"그렇다면 전 잘 모르겠는데요."

태양이 달랬다.

"얘, 귀여운 도토리야. 내 장담하지만, 후회하진 않을 거다. 언젠가 내게 감사할 날이 분명 있을 게야."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도토리는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좋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죠?"

태양은 필요한 것들을 죄다 가르쳐 주었다. 물론 과정 전부를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다. 도토리가 까무라치게 놀라버릴 터였기 때문이다. 첫번째 단계는 껍질을 깨고 뿌리를 내리는 일이었다. 도토리로서는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옛 모습을 잃고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토리는 군시렁군시렁 쉴새없이 투덜대면서도 용감하게 이 관문을 통과했다. 태양은 항상 곁에 있으면서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두 번째 단계는 싹틔우기였다. 그 역시 어려운 일이었으나 고통은 휠씬 덜했다. 그 다음에는 그 싹을 강화하여 가녀린 묘목으로, 그러고는 관목으로 성장시키는 단계가 이어졌다. 각 단계가 끝날 때마다 옛날의 도토리는 태양에게 묻곤 했다.

"지금 이대로도 절 사랑하세요?"

그러면 태양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아무렴, 사랑하고말고. 사실 난 점점 더 널 사랑하게 되는 걸. 네가 자꾸자꾸 더 사랑스런 모습으로 변해 거거든."

이렇게 도토리는 성장을 계속했다. 하지만 꼭 순탄하게만 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단계에서 기다리고 있을 고통이 두려워서, 그 단계에 그대로 머물기로 마음먹은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정체에서 오는 장애를 겪어야 했다. 침울한 단조로움과 진저리나게 일률적인 것, 그리고 답답스런 평범한, 그러니 결국 따져 보면, 그래도 성장의 고통을 따르는 편이 더 나았다. 최소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결국 태양에게서 용기를 얻어 다음 단계로 밀고 나가곤 했던 것이다.

가지를 뻗어 나감에 따라 어린 나무의 시야은 넓어졌다. 이제 그는 언덕 아래 계곡 전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곧 이웃 언덕 너머까지 볼 수 있게 되리라. 무엇이 보일까?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특히 새들이 그의 가지에 집을 짓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마침내 보잘것 없던 도토리가 참나무로서는 완전한 성숙에 다다른 날이 왔다. 그는 주위 언덕들 너머를 바라보다가 끝간데 없는 수평선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기쁨에 겨워 그 자리에 못박히듯 서 있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광경에 벅찬 감동을 어쩌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 꿈결인 양 태양의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알겠니? 자라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참나무는 다만 미소로 감사를 대신할 따름이었다.


『당신을 적셔 주는 사랑의 물줄기』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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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장애우와 핸드폰 통화하는 여인

일상 다반사 2010/03/21 04:42


언젠가 버스타고 가는 길에 뒷자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내는 소리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은데 불규칙적이고 고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듣기에는 거북할 수 있는 고함 소리와 함께 욕설비슷한 거친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자 기사 아저씨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그 사람에게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야! 조용히 좀 하라고! 시끄러워서 운전을 할 수가 없잖아!"


한바탕 기사 아저씨도 욕만 안 섞었지 소리 지르면서 그 소리를 내던 사람에게 화를 냈던 것이었다. 나도 무슨 일인가 바라보았고 이내 그 사람이 '틱장애 (tic disorder)' 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운전기사 아저씨가 화를 내는 과정에서도 불수의적인 근육의 움직임이 보이면서 눈의 깜박이는 횟수가 일반인들에 비해 빈번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알 수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일어나 그 아이의 대변인인 것처럼 아이의 상태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런 행동 및 말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기사 아저씨와 승객들은 나의 이야기에 어느정도 이해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얼굴 안에서는 불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운전에 방해되는 것은 사실이니 오히려 나에게 어떻게 해보라는 것이다.


마땅히 할 것이 없는 나는 그 아이의 옆에서 반복적인 틱 행동에 대해서 조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외엔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을 끄는 사건은 그 이후에 발생하였다. 하차하는 문 바로 앞에 앉은 20대 쯤의 젊은 아가씨 한명이 전화를 하면서 정말 모든 승객이 다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하루의 쌓인 스트레스를 풀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 아가씨는 방금 전 있었던 버스 안의 상황과 틱 장애를 가진 아이를 '병신같은 얘'라는 표현을 하면서 친구에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솔찍히 그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는 나를 제외한 많은 승객들은 그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들으면서도 그리고 시끄러우면서도 그냥 무시하면서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까는 그 순간 순간의 틱 장애로 인한 소음조차 듣기 싫어하던 기사 아저씨도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아가씨의 전화는 대충 5분 가량을 넘어가고 있었고 일상에 대한 반복적인 이야기로 집중하고 있었다. 소음의 질과 양으로도 틱 장애 아이의 것보다 탁월히 우수(?)했었다.


듣기 거북한 나는 결국 아이의 곁을 떠나 앞으로 가서 그 아가씨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얘기했다.
 
"아가씨 혹시 수다떠는 틱 장애 가지고 계신가요? 그럼 이해해드리고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조용히 해주세요."


결국 그 아가씨는 "별꼴이야 뭐 이런 XX가 있어!" 라는 정감어린 소음을 듣고 내리는 것을 보고 조용한 버스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아이도 곧이어 내리면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내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옆에서 누군가 난처한 일에 당할 때 도와주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지나치고 싶어한다. 그리고 괜히 불쾌해질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쾌함을 느껴도 그냥 맘으로만 불쾌해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 틱 장애를 가진 아이와 수다떠는 아가씨를 보면서 남들을 위한 배려는 어쩌면 남의 상황을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수용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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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중심

원준이 생각 2010/03/18 14:20
오늘의 말씀 (요한 5,31-47)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나눔거리

예수님을 믿나요? 하느님을 믿나요? 그리고 성령은 믿고 있나요?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은 교리적으로도 얼마나 어려운지는 교회의 대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노의 일화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느날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적인 해석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바닷가에 쉬러 갔는데 해변가에서 아이들이 빈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해변가의 얕은 웅덩이를 만들어 거기에 퍼 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평생 그렇게 해도 못할 것이라..."며 얘기하니 그 아이는 버릇없이 손가락질 하면서 "당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보다 이 일이 더 쉽지요." 하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는 커녕 우리가 믿는 주체에 대한 명확한 대상이 없이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를 하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심을 깊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더 도움은 되겠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에 잘 맞춰 살아가고 선행을 베풀고 있는 그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이 존재하고 그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모범입니다. 자신의 곤란과 고통으로 자신의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고 그 신앙의 중심은 항상 내가 아닌 하느님이셔야 합니다. 

어려울 수록 자신은 자신을 중심에 놓기 쉽습니다. 상황의 불리함속에서도 자신을 합리화할려고 하고 그렇게 합리화 한 후에 성경의 말씀으로 끼워맞추는 합리화의 신앙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려울 수록 힘들수록 그리고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정말로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기도한다면 그리고 기 기도의 응답을 자신의 욕심이나 편견없이 잘 듣는 집중력을 가진다면 하느님이 주시는 뜻을 예수님처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문

일이 잘못되었을 때 왜 그렇게 했을까 후회하는 것은 그 일을 자기중심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하느님 중심에서 보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할 때는 진정으로 죄의식을 느끼고 영혼의 흠집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백할 내용은 '가'인데 사제로 하여금 '나'로 알아듣게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 고백이다. 
영혼의 흠집을 바로잡는 영적 변화가 일어나야 올바른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이싿.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잘못을 저지른다. 
고통의 한가운데,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는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도 나무 뒤에 있는 그림자만 보일 뿐 아름다운 꽃과 잎을 틔워내는 은총은 보지 못하기 쉽다. 

"마음의 치유와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집착 때문입니다." 

김웅렬 신부님 (토마스 데 아퀴노) 의 품 너른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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