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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2/01/29 00:59
EBS 에서 방송한 '동과서'라는 다큐를 보면 많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이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잘 만들어진 다큐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동양인과 서양인이 마치 남과여처럼 문화적인 차이에 의해서 바라보는 시선과 그에 따른 행동 양식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누군가의 고민을 듣다 보면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같은 주제, 예를 들어 자신의 미래의 진로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걱정과 고민을 털어 놓는데 어떤 이들은 주로 동사로 이야기하는 경우와 다른 경우는 명사로 이야기 하는 경우이다. 즉,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이것을 할 수 있다. 때로는 행동의 일련들을 걱정하는 경우가 그 경우이고 다른 경우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상, 시험, 점수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요소 등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비단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라는 구분이 아니라도 개인적인 차이로 인하여 소위 '명사로 고민하는 경우'와 '동사로 고민하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동과서 다큐멘터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동양인과 서양인의 일반적인 성향을 구별해서 정의한다.
동양인은 동사로 세상을 보려하고,
서양인은 명사로 세상을 보려한다.
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러한 구분적 성향을 몇가지 설문조사와 테스트를 통해서 동양인과 서양인이 구별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문화적인 차이, 교육의 방식 등 여러가지 환경의 차이가 분명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고 서양문화에 익숙해진 동양인,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떤가에 따라서도 재미있는 내용이 도출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전개로 나타나는 다른 성향은 관계성에 대한 부분이다.
다음의 그림을 보면서 가운데 사람은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의 질문을 하면...
 출처: EBS 다큐멘터리 '남과여'
가운데 사람은 웃고 있지만, 가운데 사람을 제외한 주변의 사람들은 얼굴이 밝지 않은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동양인의 경우 아무리 가운데 사람의 얼굴이 밝다고 하여도 주변 사람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란 의견이 많았고 서양인은 그 사람만을 보고 주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며 그 사람은 웃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동양인은 주변의 관계를 포함해서 판단하며,
서양인은 대상의 상태에 집중하여 판단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서양에서 계속 교육을 받은 동양인의 경우에 서양인의 시선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동양인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서양에서 모든 교육을 받은 동양인의 경우에도 오히려 서양인의 시선보다는 동양인의 시선을 가진다는 점이다. 주변의 외국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이러한 양상은 꼭 문화적인 배경때문이 아니라 다른 부분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시선과 관점은 서양인과 동양인의 큰 오해를 일으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가장 큰 오해의 예가 미국에 사는 한국인 부모 중에 자식의 사고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정서처럼 '내 잘못이야! 내가 다 잘못한 거야!' 라는 한풀이 같은 이야기를 그대로 번역해서 실제로 지방 검찰이 기소를 한 경우가 있고 자백(confession)의 형태로 받아들여진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정서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서양인들의 시선에서는 그런 말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병원에서도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난다. 동양인의 경우에는 자신의 아이가 병에 걸렸다고 하면 부모의 반응은 "①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죠", "②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내 자식에게..." 와 같은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분석하자면 아이의 병이 부모의 잘못이라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① 은 마치 병이 걸린 병리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 같지만 그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병리학적 소견을 보호자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모 병원에서 같은 상황이 일어났고 통역을 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의사에게 물어봐서 의사는 이 이야기를 병리학적 원인을 물어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자세히 설명했으나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졌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정말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은 주로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서양인들은 때로는 참 단호하고 냉정한 경우까지 포함해서 단도직입적으로 "③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가 가장 큰 반응이다. 그리고 다소 사소한 차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동양인은 "ⓐ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나" 라며 환자 뿐만 아니라 내포적으로는 환자 주변의 가족들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듣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서양인은 "ⓑ 아이가 어떤 치료를 받고 어떤 과정을 겪어야 하나"로 표현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표현의 차이는 언어적인 차이때문이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적인 차이를 떠나서 부모의 마음은 다 아프고 힘들겠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대처하는 방식은 관계에 대처하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시선의 차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동과서 에서 다루었던 관계에 대한 동양인과 서양인의 시선의 차이는 비단 인간 관계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픈 아이를 두고 별로 알아도 소용없는 "왜 아이가 아프게 되었을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동양인은 어떤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관계, 인과관계 뿐만 아니라 인연설과 같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가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서양인은 아이의 아픈 것은 사실이고 그것에 대한 왜?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기 쉽다는 것이다. 때로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내면에 그런 관계성보다는 자신의 아이라는 주체가 지금 상태가 이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는 주체 중심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언어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언어의 구조가 이런 시선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이런 시선을 생물학적으로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어 그런 표현을 나타내는 언어가 나온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과여 의 문제만큼 동양인과 서양인이 바라보는 이 대비적인 시선의 차이는 비단 동양인과 서양인에 대입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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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2/01/07 03:17
깨어 있으라 (마태 24, 42)
애플에게 창의성, 혁신성 등의 어떤 좋은 수식어를 붙어도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죽음 앞에서 안타가움과 수많은 슬픔이 공존했고 분명 역사상 기록될 인물임에는 동감하지만 그의 자서전 안에서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애플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스티브 잡스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간직하고 세상을 떠난 유명인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실 애플의 기업 운영 방식이나 생산공장의 관리 방식, 그리고 부품 및 공급자 관리 방식은 다소 혁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혁신의 방향이 정말 옳은가에 대한 고민은 별도로 해야할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하는 첨단 기계, 생산품들이 우리들이 그것을 누리기 위해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정당하지 않은, 혹은 턱없이 부족한 댓가를 통한 어쩌면 건강 및 교육의 권리마저 빼앗기며 쓰게 된다면 정말 우리는 그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이 없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세상의 잘나가는 기업들은 다 그렇게 하는데, 뭐 그런 기계 어떻게 다 일일히 확인하며 쓸 수 있냐고 반문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지만, 반대로 그래서 기업의 도덕적 경영 방향은 더욱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애플은 초기부터 스티브 잡스의 경영 방침에 따라서 제 3국가의 노동력을 이용하고 부품 조달 방식을 쥐어짜기 공급 방식을 통해서 단가를 획기적으로 줄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부품 조달에 따르는 sub/subcontracting 의 이윤에 대해서 별로 관심가지지 않고 싼 공급을 우선적으로 했고 애플의 폭발적인 인기와 보장된 시장을 무기로 공급책을 관리해왔다.
이러한 방식은 비단 애플만의 방식은 분명 아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과 1차하청 기업은 이윤이 나지만 2차이상의 하청업체들은 직접 계약도 안되기에 1차하청업체의 횡포로 인해서 연쇄 도산, 및 자금난에 빚에 허덕이는 소규모 기업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는 현재 2차 이상의 하청업체의 이익율이 -7%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대기업의 이런 횡포는 상생이나 동반 성장 같은 개떡같은 슬로건 하에 더욱 더 조여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망하면 그를 대체할 다른 기업이나 이젠 노동 인건비가 싸게 나오는 해외로 그 공급 물량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너무도 복잡해진 산업 구조와 갑, 을의 관계 안에서 을의 희생만을 통해서 갑의 살만 찌우는 구조가 되면 경제가 정말 발전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고통과 희생이 가까이는 우리의 가족 혹은 우리의 이웃일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의식있는 경제학자는 독식과 자본주의 자본 논리로 인간의 생존권 때로는 생명까지 빼앗는 기업들의 도덕적 경영 지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그 기업과 같이 사업 파트너가 되었을 때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과 관계성에 대한 인식 수준 (예를 들어 동반자로 바라보느냐, 공급거래의 불공정 거래 빈도 등)을 통해 기업의 도덕성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업의 패러다임은 바뀌게 될 것이다. 이런 도덕적 경영이 패러다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이 인간의 존엄성을 판단하여 어떤 사람은 희생의 노동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탐욕스런 자본가가 되는 것에 더이상 가속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넘어오면, 우리가 구입하는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희생에 근거한 것인가 깨어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개인의 소비의 기준이 이제 질좋고 값싼 이라는 측면에서 min(sum(타인의희생)) 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정책적, 실질적 대안을 통해 우리가 자각하는 방법론이 우수한 사람들에 의해 개발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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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2/01/05 07:02
페이스북의 화면에서 메뉴를 클릭하거나 글들이 독립적으로 구역별로 업데이트 되거나 해당 글을 눌렀을 때 혹은 글쓴이나 댓글을 쓴 사람에게 마우스가 있을 때 전체 페이지는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팝업 화면이 깔끔하게 나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정말 대수롭지 않게,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런 요소들을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이런 기술이 자유롭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몇년 되지 않았고 이 개념이 도입된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당시 이 웹 기술은 과학잡지 Science 지에도 소개가 될 정도였다. 이제는 뭐 정말 대수롭지 않게 쓸 수 있는 요소기술이지만 그 전까지 이런 방법을 해결하지 못해서 웹사이트 상에 채팅방 하나를 만들어도 매번 웹페이지가 계속 페이지 고침(reload; F5)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제는 웹에서 거의 모든 사무적 작업 뿐만 아니라 복잡한 공학적 기능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찾아왔다.
이렇게 우리가 별 느낌없이 쓰는 대부분의 기술, 그리고 우리의 삶안의 많은 요소들은 누군가 처음으로 기능의 결핍, 즉 부족함 혹은 필요함을 느끼고 그에 따라 그 필요성을 창출해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그 누구도 웹사이트에서 문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그 오래전 계속 페이지 고침으로 모든 웹이 이루어지는 그 상태 그대로 존재했을지 모른다.
요즘 유행하는 김어준의 말처럼, 자신의 스트레스의 근원이 정치이고 투표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행동이라는 이야기처럼 남들이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데 본인이 느끼는 그 불편함의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그 과정 안에 인간은 창조의 과정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그 결핍, 부족함의 주체가 될 때 이 시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그냥 그 불편함을 무시하고 살아가며 그 불편함에 내성이 생겨 그냥 사는 방법,
다른 하나는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창조적 작업으로 변환하는 방법.
인간이 발명(?, 개인적으로 세상엔 발명은 아닌 발견이라 생각하지만...)은 그래서 불편함의 산물이다. 편리함에 파묻혀 그 이기만을 누린다면 우리는 창조적 발명품의 노예가 될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불편함을 거부하지 않음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지혜가 될 수 있음도 창조적 발명품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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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2/01/04 18:37
결혼한지 20년,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인의 남편이고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간지 20년이 지나도 남자의 마음 안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한 여인의 잔상이 남겨져 있다.
분명 사랑하고 그리고 그 결실로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 결혼 생활이 불행하거나 남들이 보기에 행복하지 않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남자의 마음 한 구석엔 항상 지워지지 않는 연애 시절, 지금의 부인 이전의 어떤 여인에 대한 잊지 못하는 그리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문뜩, 알 수 없는 그리움 그리고 어떤 먹먹한 가슴을 쥐어잡으며 그런 자신의 모습의 결론으로 나타나는 한 여인의 이미지를 지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를 가진 남자는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 앞에서 다가오는 책임감과 가장으로의 도덕적 의무감,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의 흐름에 그 이미지를 혼자만 간직하고 겉으로 이야기하거나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
생각보다 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의 배우자 외 아련한 아쉬움 혹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자신의 이미지를 공개하고 자신의 가정과 부인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배우 신성일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나이 들어....', 어찌고 저찌고 그런 반응이었지만 사실 그런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하지 않는 공감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그 이미지를 놓치 못하고 결국 자신의 현재마저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찌질함에 속하겠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건 반대로 성숙함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때 조금의 용기가 있어 먼 훗날에도 떠오를 그 이미지의 대상에게 용기있게 고백할 수 있다면 차라리 분명 아쉬움은 덜 했을 것이다.
인간은 분명 이상한 동물이다. 겉으로는 해서 후회하는 일들만 이야기하면서 사실 하지 못해 후회하는 일들로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동물이니... 그래서 본능만 존재할 것이라고 다른 생명을 미물로 놀리면서 한편으로는 그 본능에 충실한 짐승들을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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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1/12/23 18:16
누군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시한부 혹은 불치병을 선고받았다고 하자.
삶이 소중해질까 아니면 삶이 무의미해질까?
우리가 즐겨 찾는 착각중에 하나는 세상의 인과관계는 정확할거란 잘못된 믿음이다. 즉, 대부분 결과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인과관계에 의해서 이런 이유로 이런 결과가 이루어졌다며 즐겨 분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인과관계의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지금 이루어진 결과가 인(因)이 되는 과(果)가 무엇이 될것이냐고 물어보면 머뭇거릴 것이다.
그렇게 인과관계의 전문가인척 세상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원하고 말하고 싶은 방향대로 끼워맞추기일 뿐이다. 인과관계란 존재한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만든 자연 법칙이 아니라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insensible) 거대 법칙 (universal law) 에 의해 지배당하고 우리는 그냥 관찰할 뿐이라고 했다.
사실 그런 결과를 두고 이야기하는 인과관계의 역추적은 우리에게 큰 편견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과정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다.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해석하고 분석해야 우리는 그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유사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잣대로 그어버린다.
우리는 그래서 인과관계의 희생물(a casualty of causality)일 뿐이다. 아이러니 하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인과관계의 희생물로 상처받고 고통받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책 또한 하늘의 조화로운 그 법칙으로는 인과응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불교의 retribution 혹은 karma 라 부른다.
세상이 부도덕하고 잘못된 인간들이 정의를 짓밣으면서도 그들은 인과관계를 통해 모든 변명과 자신의 이익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정의란 인간이 무수히 지꺼리는 말로 성립되는 것이 아닌 것임도 알것이다. 그것이 억울하고 당혹스러워도 막연한 정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 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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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1/12/03 22:54
요즘 종교에 드는 나의 생각들을 모아서...
⑴ 내 종교가 소중하다면 다른이의 종교도 소중하다.
간혹 종교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가능하면 종교는 신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같은 종교가 아니면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안할려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종교가 '더 좋다' , '더 옳다' 를 이야기하는 것은 뭐라 하기 싫은데 그런 와중에 자신의 종교가 더 좋은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너의 종교는 이래서 틀리고 저래서 틀리고' 라며 이야기 시작한다. 특히 내가 아는 사람중에 당신의 종교를 믿는 사람 누구는... 특정 인물을 비판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판단하지 말라는 종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통해 상대방을 판단한다. 자신의 종교가 좋다를 이야기하지 왜 상대방의 종교가 틀리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신의 종교가 진리이고 확실하다고 믿음에 가득 찬 사람들만큼 교만에 가깝지 않은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비단 이는 소위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종교도 결국 인간의 믿음이다. 굳고 강한 강철일수록 강한 충격에 한번에 잘라지고 연하고 무른 강철일수록 그만큼 변형되기 쉽듯이 우리의 신앙도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충격에 쉽게 끊어지기도 때로는 너무도 나약하게 변형되기 쉬운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종교의 당위성을 도덕적 의무감으로 변질해 누군가에게 부과한다면 결국 종교는 '신'만이 믿을 수 있는 종교가 되어버릴 것이다.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보살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종교의 첫번째 가르침이 사랑이라면 말이다.
겸손의 옷을 입은 사람은 결코 종교를 무기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을 것이다.
⑵ 믿음과 신뢰의 영역 - 종교는 자판기가 아니다.
어디서 본 건지 기억은 안나지만 믿음과 신뢰란 단어를 한꺼번에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잠시동안 두가지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두가지가 어떤 의미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지만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뢰(信賴)란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처럼 믿고 의지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가 더 강할 것이다. 그래서 비지니스에서 믿음이라는 말보다는 신뢰라는 말을 더 어색하지 않게 쓰는 것이고 연인 관계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으로 이어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뢰라는 말은 조금 어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상호 이해관계가 섞여 있는 성격은 신뢰라는 말이 더 쉽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호 관계성을 강조함에 따라서 그 신뢰의 바탕은 막연한 대상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s)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금융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즉, 현재의 내용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게이지(gauge)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쉽게 신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Trust in God 란 말은 영어 문화권에서 사용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는 신뢰(credit)이란 뜻이 아니라 (sincerity in belief)란 말로 오히려 믿음 중에 조건없는 믿음(unconditional belief)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강하다. 우리가 신을 믿는 한 신은 우리에게 자동판매기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뽑아 주지 않는다. 자판기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물건을 내어 준다면 그런 신뢰없는 자판기를 더이상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청원하는 것들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더이상 내가 바라던 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종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뢰는 그만큼 상호 관계성과 함께 그 상호 관계 안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예상을 기반으로 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본인이 원하는 모습의 신이 아니라도 불가능하고 내 인지력의 이상(beyond recognition)이라 할지라도 신은 신뢰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비록 내게 나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내가 받는다 할지라도, 고통, 아픔, 슬픔, 그 어떤 것이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얻는다 해도 지키는 것이 믿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신뢰의 그 이면에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함께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신뢰를 쌓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목적을 위해 다른 이름의 믿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을 주는 신에 대한 믿음과 같이...
⑶ 신앙인이 마지막까지 붙잡을 수 있는 건 사랑하나 뿐이길...
상상해보아라...
만약 누군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돈을 원해 부자가 되어도 전쟁이 일어나 돈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고
명예를 원해 높은 자리에 올라도 누군가의 시기로 죽음을 당할 수 있고
그 어떤것이든 인간이 만든 자리와 인간이 만든 물건 을 원한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희미하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사랑'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살인자의 마지막 순간에도 어쩌면 어머니의 사랑이 있을 것이고 어머니마저 잊혀버린 사람이라도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연민이 있을 것이고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 안에서 마지막 순간이 있다하더라도 그 어딘가 혹시나 모르는 자비의 마음이 그를 향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른 언어로 부르지만... 연민이나 자비나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따뜻한 말들은 결국 '사랑'입니다. 인간의 그 욕심에 그저 다르게 부르고 싶을 뿐이 아닐까요.
가족이 짐스럽고 힘들고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생각은 정말 죄일 것이다. 내가 힘든만큼 가족들은 오죽할까 그리고 그 삶의 힘든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언제인가 신부님이 고난의 세가지 모습을 설명해주셨다. 자신의 길이 바른 길이 아닐 때 가이드 같은 훈육, 자신의 성장을 위한 통고 그리고 세번째가 십자가라고... 그 십자가를 버리는 순간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보며 예수님의 제자라 불리워지게 된다고...
그런 명예로움이나 영광스러움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가족이 행복할 때 나또한 "자유롭게" 행복할 수 있음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나 혼자라면 느끼지 못하겠지만 내 곁에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어 내 십자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모두들 피하고 싶은 그 고난과 고통안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늘 나의 작은 십자가마저 불평하려는 순간 또 이렇게 알려주신다.
천주교를 믿는 이 중에 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앙에 대한 자긍심도 있고 스스로 천주교를 믿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어떤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자신이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에 대해 듣곤 했다.
기도를 하던 중 '초 자연적'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났거나,
꿈 속에서 예수님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거나 하는 등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일상의 삶은 불평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불만족, 때로는 자신의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의 탓으로 돌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 또한 종종 듣게 되었다.
종교인으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을 무척이나 '선택받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그 자매님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일상이 기적이고 신비로운 매 순간임은 잊어버리고 왜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려고 할까...? 그런 묘한 감정이 쌓였을 때 신부님의 주일 강론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신이 주는 기적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의미있게 신의 표징이 되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번째는 매일의 삶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두번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 얼마나 큰 신비로움과 감사함으로 아직도 내가 살아있는지 정말 '살아 숨시는 매 순간이 기적임'을 느껴야 겠다.
오늘 하루 아무리 불편하고 불평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해도 감사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내가 무사히 하루를 마쳤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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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1/11/22 21:54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말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부족함을 표현할 것이다.
◈ 첫번째 에피소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도 힘들게 보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이 해야하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하는 것들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 늘 사람들로 부터 사교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큼 쾌활하고 유쾌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래서 그 사람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인상도 그늘 진 모습보다는 유쾌함에 묻어 나오는 선입견인지 사람들에게 호감을 더 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밝은 모습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 부터 상처도 많았다. 그 사람에게 그 상처는 항상 이겨야 하는 대상이었다. 어떤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솔찍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고백을 통해서 자신 만이 가지고 있는 짐이 덜어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아왔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두통에 필요한 진통제를 먹듯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위로를 받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큰 상처나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뭔가 풀리지 않는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 마치 진통제를 먹어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두통에 소화제를 먹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받지 못하면 그 관계의 본질이 이루어지지 않는 느낌으로 자신의 주변엔 자신보다 상처가 덜하다고 생각하거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을 모으게 된다.
◈ 두번째 에피소드
사람간의 이별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별이라도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별에 있어 그 이유가 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고의 현장에 아버지가 그 시간 그 곳에 있을 이유까지 찾을 수는 없다. 이미 끝나버린 이별에 매달리며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찾으려고 말이다. 연인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차이든(dumped), 차든(dumping) 항상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별의 이유라고 찾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를 하면서 과거의 상대방을 평가하며 상대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자신은 항상 옳은 판단과 행동을 하면서 살았지만 상대방이 모든 원인 제공을 했고 나는 참을만큼 참아보았고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라며 그 이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이별이 비참해지고 누군가 물어보는 '왜 이별했어?'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것 같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나는 이별을 통해서 성숙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며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위로와 감정의 동감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진실했고 그 진실의 반대편에 상대방은 항상 진실하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때는 다 이해했던 구체적인 행동들을 꺼내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하다. 상식이하라며 자신의 심미적 감정의 기준을 대어 하나하나 판단하며 그 큰 맥락이 결국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라 이별이 생긴거라 이야기 한다.
... 상처를 받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변명일 수 없다.
스스로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본질적인 상처를 꺼내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대부분 상처를 받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과거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뿐이다. 그 누구도 나의 상처를 다른 이에게 완전히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부모의 학대를 받은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모여도 그 상처는 사람 수만큼 다르다. 아마도 같은 부모의 학대를 받은 형제남매라 할지라도 다를 것이다. 그만큼 사람은 상처에 대한 각기 다른 수용과 감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A 라는 아이는 그 상황을 탓하며 자신의 방이 없어 공부할 수 없음을 상처라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 B 라는 아이는 자신의 방이 없기 때문에 가족들과 살겹게 보낼 수 있다는 행복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상처란 절대적으로 이것이 상처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는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의 빗장을 열기 전에는 상처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넌 왜이리 못생겼어'라는 말 자체가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 들여 '내가 못생겼다' 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상처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로 잠시 넘어와서 자신의 상처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크게 두가지의 유형이 보인다. 첫번째는 그 상처를 통해 상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그 반대편엔 자신의 상처를 좀더 들어달라는 더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무리 힘든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이것이 상처다 저것이 상처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자는 자신의 상처와 항상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판단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대방이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해도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며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상처에 대한 비교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 남에게 상처주면서도 '나도 이정도 상처 안에서 살았는데...' 라며 남에게 쉽게 상처주곤 한다.
이야기의 패턴은 항상 비슷하다. ① 나는 이런 상처를 받았다. ② 나름 많은 고민과 노력으로 성장하였다. ③ 다른 이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비교 분석한다. 상처는 치유하고 내적 성장을 위해 존재할지 모른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이해하라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남의 상처를 비교하고 판단하는데 사용한다면 그 상처는 하나의 독이 될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어야지 판단의 근거가 되서는 안될 것이다.
... 자신의 진실함을 핑계로 상대방의 순수성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다.
배려란 참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만나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두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둘 모두 자신의 이야기하지 못하고 참아오거나 두번째는 정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경우. 둘 모두 그리 정상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만난다는 것은 그래도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상대방을 통해서 나와 서로의 관계를 찾아가는 하나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시작은 그러한 서로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런 접점을 찾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사실 이별의 시작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든, 성격적인 이유든, 그 이유는 그냥 이별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일 뿐이지 대부분 자신이 기대치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클 것이다. 그 구체적인 항목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별또한 아픔이고 상처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헤어지고 서로가 남이 된 상황에서 가장 재밌는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상당히 객관적인 자신을 설정하고 이별의 이야기를 자신의 주변에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별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항상 진실해왔으며 상대방에 대한 상황과 행동을 자신의 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동의를 구한다. 나는 진실했고 여러가지 상황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사람 그때 그런 행동들은 정말 인간 이하의 행동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며 자신이 이별의 당연함에 동의를 구하게 된다.
대부분 자신의 행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에 맞춰 상대방을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고 그 대부분의 결론은 상대방은 원래 진실하지 못했고 상대방은 순수하지 못하다를 결론낸다. 그렇게 나쁜 경험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동정과 연민을 얻어내면 자신의 마음이 수월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런 소모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만남에서 자신은 진실하고 상대방의 순수성은 더럽히는 것이 자신이 이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노력한 내용들에 대해서 부연설명하며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순수성을 판단하면서 자신이 순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만에 가깝다. 이별의 순간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성찰만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착하고 진실하게 되기 위해 지나간 인연에 대해 순수하지 못함을 가쉽하는 그 행동은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찰은 토론이 아니다. 누군가의 동의가 이별에서 자신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외치면, 그 어떤 만남에서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을까. 이별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만남의 해소일 뿐이다.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이별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면 몇번의 상처와 이별을 통해서도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 판단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바라보는 기준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결국 몇번이고 실패라는 냉소만 쌓이고 고요함 안에서의 자신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동의만을 통해 잠시 아픔을 잊게 하는 진통제만을 먹는 효과일 뿐이다.
자신의 상처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주며 다른이의 상처를 판단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하며 다른이의 영혼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묘하게 재미있는 교차점을 가진다. 그것은 침묵 안에서 들릴 수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듯 하지만 결국 다른 이를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많아도 다른 이를 위한 배려는 배우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이런 모습들을 지우기 위해 성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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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1/11/07 17:09
사용하는데 편리하고 우리나라 블로그의 대중화에 힘쓴 티스토리(tistory) 의 마음은 고맙긴 하지만 모바일 스킨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그동안 불편해 하며 Script 로 모바일 주소로 전환해서 사용하던 불편함을 해소해주나 싶었다.
그러나 상당히 참고 참고 그래도 고쳐지겠지 싶은 마음으로 기대해보았지만 점점 심해지고 마는 티스토리의 서비스를 어떻게 해야하나...
온라인 상에서 자신의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해서 이를 통해 수입을 얻는다는 인터넷 광고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네티즌들은 이를 통해서 많은 수익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 수익을 얻을 수 있을지라도 광고를 삽입하거나 붙이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티스토리는 서비스 초기부터 맘에 드는 서비스였다. 기존의 포털서비스들이 행하던 무분별한 광고가 기본으로 첨가되어 있는 블로그는 그 편리성과 접근성을 무기로 수많은 자신들의 고객들을 '광고 Agent' 로 이용해왔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 반면 티스토리는 광고는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스타일을 변경할 수도 있고 편리함을 제공해주고 있어서 사용하는데 만족하였다.
그러나 모바일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순수한 의미에서의 서비스 제공이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스킨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편리성에 기뻐하며 설정했지만 모바일에서 실제 보는 화면은 정말 실망 그자체일 뿐이다.
본 블로그를 모바일 기기를 통해 들어오면 글 목록과 함께 하단으로 내려보면 다음과 같은 광고가 뜨고 그 아래에는 말도 안되는 실시간 검색어까지 뜬다. 내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동의한 적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닐뿐만 아니라 설정하는 화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붙어질 것이라는 내용에 대한 내용도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티스토리의 논리가 무료로 사용하는 공간이니 그에 합당한 서비스에 대한 댓가를 모바일 화면으로라도 보상하라는 식이라면 처음부터 가졌던 서비스의 전략은 좋은 것으로 꾀어내어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비단 이러한 문제는 티스토리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네이버나 다음 등의 거대 포털 서비스들은 서비스 초기부터 친숙함과 국내 사용자들에게 무료라는 쉬운 미끼를 통해서 서비스를 사용하게 만들었음을 잘 알 고 있다. 그러나 검색엔진 회사라고 하기엔 너무도 폐쇄적이고 사용하는데 사용자의 편리성을 추구하기 위해 웹 표준을 무시하거나 기술적으로 잘 모르는 내용을 감추며 서비스한 내용들이 많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거대 포털 서비스를 신뢰하지 않고 그들의 서비스는 그냥 아쉬운대로 정보를 얻기 위해 카페 나 블로그를 들어가기 위한 기본적인 서비스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포털 서비스는 전략이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있다. 정말 그들이 지켜야 하는 원칙이 뭔지, 그들이 금지해야하는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는지 궁금하다. 사실 인터넷 광고 노출을 통해서 얻어지는 수익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큰 규모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러한 효과적인 채널을 제공하는 댓가는 크다. 일단 광고주들의 큰 돈을 만질 수 있으며 작게는 자신의 소규모 사업을 광고할려고 하는 영세 업자들의 코묻은 돈까지도 긁어 올 수 있는 좋은 사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광고적 수익을 위해 사용자들의 자율성을 제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새로운 블로그 홈을 찾아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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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1/10/07 16:54
고등학교 1학년때 임파선 종양으로 수술과 항암치료를 끝냈을 때는 그 때가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병원 치료는 받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지금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의 아픔이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만 바라보았던 이기적인 나에서 세상에 아픈 아이들이 있고 세상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아픔이 있을거라는 것에 대한 인지, 그리고 종교에 대한 시작점을 만들어 주어서 삶을 돌이켜 볼 때 필요했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순조롭게 잘 지내고 대학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니고 공부에 대한 욕심인지 무엇인지 모르지만 싱가포르에서의 삶은 흥미진진하고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고 생각할 무렵, 뜻하지 않게 집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쓰러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택시타고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에 들어가서 검사를 받았을 때 내가 제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단어를 들어야 했다.
Brain tumor, you got...
똑똑히 너무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었던 그 단어 안에서도 난 믿을 수가 없었고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항암제를 투여받으며 가장 부러웠던 친구들은 모자를 좋아하는 아이들이었다. 오늘은 어떤 모자를 쓸까, 항암제로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아이는 모자를 쓰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아보였다. 나는 모자가 싫었다.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머리카락 몇가닥을 항상 안타가워 하고 슬프하면서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모자는 나에겐 마치 죄수의 수인 번호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정말 볼품없고 민둥머리에 가까운 그 머리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두번째 싫어했던 것은 죽이다. 아픈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는 그 인식에 그 이후에도 속이 안좋아도 죽을 먹기 싫어했고 차라리 아픈 배를 이끌고 고기를 먹으면 먹었지 죽은 죽어도 먹기 싫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모자쓰는것, 죽먹는 것은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아마도 내가 아프지 않아도 아픈 사람이라고 표시되어지는 그런 물건들로 연상되어 그냥 알아서 싫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싫었다. 항암치료가 채 끝나지 않은 고등학교 1학년 다시 복학해서도 한달에 한번 반 학급 친구들 아무도 모르는 조퇴를 하고 항상 병원에 치료 다니면서도 그리고 치료받기 때문에 공부 못해도 될거라는 핑계는 스스로에게 용납되지 않아 항암제를 몸에 가두고 전교3등을 했던 기억도 난다. 공부를 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아프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아픈 사람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가장 싫었다.
싱가포르에서 달고 온 뇌종양도 심지어 1년여동안 부모님 모르게 혼자서 치료받았다. 다행히 병원일을 할 수 있어서 치료비의 부담은 적을 수 있었지만 한번 치료 받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떨리는 순간에도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맡겨졌던 발표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쉽게 누군가에게 얘기하지도 못하고 얘기하더라도 정말 남 얘기하듯 얘기하는 그 와중에도 그렇게 내가 아픈 사람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못하고 난 아무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그래서 그런지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생각되어지는 신에게 원망으로 시작하며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왜 나에게만 이렇게 하시는 건가요..., 무엇을 그리 내가 잘못했나요..." 누구도 들어주지 아니 하기 싫어 숨기고 싶었던 그 이야기는 결국 너무도 할 수 있는게 없는 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은 오히려 내가 이겨낼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인내에 대한 테마를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이 다시 일어났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종양의 영향인지 아님 다른 영향인지 몰라도 이제 다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첫 치료... 생각보다 힘들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마음이 차갑고 힘이 빠지는 치료의 과정을 보내고 조금 힘내 일어서보지만 왜 또 이런 시련 안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지 원망이 조금 더 큰 하루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누구에게도 얘기하고 싶지 않던 그 이야기를 이젠 그냥 내려놓는 심정으로 그냥 적어봅니다. 누군가 나를 병자로 바라보는 그 끔찍한 기분을 싫어하면서도 왜 이렇게 적어 내려가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는 그렇게 기도하고 나 스스로에게는 너무도 소흘했던 기도 때문인지 저를 알고 있는 분들이 저 대신 저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막연한 기대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랫만에 노트북도 꺼내어 평소와 같이 하던 일들, 공부들을 하고 싶었는데 막상 아... 다르구나 하는 마음만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지만 그냥 기도의 큰 힘을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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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생각 2011/09/19 05:16
아무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인식
그러나 그것을 한계라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발전한다.
겸손을 가진 발전은 그래서 사람들을 아름답게 살게한다.
죽음의 결정은 내가 할수 없다는 유한에 대한 인식
그러나 그것을 유한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성으로 희망한다.
숙명을 가진 이별은 그래서 사람들을 아름답게 죽게한다.
할 수 없음에 안타가워 해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할 수 있음에 자만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음은...
유한한 삶에 대한 겸손함과
죽음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교체해 흐르는 그 교차점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감한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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