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1/12/29 사는 즐거움을 느끼려면
  2. 2011/12/12 흉터
  3. 2011/11/22 세상에 상처와 이별이 있는 이유는...
  4. 2011/07/18 시선에서 자유로와지기
  5. 2011/05/22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6. 2010/09/08 지배자
  7. 2007/04/07 상 처

사는 즐거움을 느끼려면

사람들 생각 2011/12/29 17:43
안셀름 그륀

우리는 실제로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바로 새해의 시작입니다

당신은 우리 삶이 새롭게 달라질 거라고 신뢰하십니까? 그리고 우리 생명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워지고, 우리 내면에는 언제나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근원의 샘이 흐르고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샘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샘은 신으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작이란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을 헤아리고, 내면의 원초적인 불안과 동경을 이해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일요일과 축일에만 인생의 환희를 맛보게 하는 건 아닙니다. 천사는 매일 아침 당신 눈을 뜨게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합니다. 천사는 당신 손을 잡고 인생은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건강하다는 것, 즉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자유로이 숨 쉴 수 있다는 것 또한 즐거운 일입니다.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뜻밖의 기쁜 일들을 느끼는 것이 바로 환희입니다.

풍경은 말(言)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과 노래로 표현되고 찬미되지 않는다면, 풍경은 단지 존재하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로 불렀을 때 풍경은 실재합니다. 그건 바로 풍경 속에 잠자고 있던 생명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수도사들은 인간을 위한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이 나도록 찬양합니다. 창조물은 신의 은혜에 감동한 인간의 찬양으로 완성됩니다. 하지만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은 창조물 속에 존재하는 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만을 위해 세상을 개발하는 사람은 창조물의 비밀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맙니다.

삶이 주는 즐거움만을 맛보려 해서는 안됩니다. 약함을 피하고 선함을 행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단념을 배워야 합니다. 단념은 내면의 자유로 가기 위한 금욕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환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외부로부터 강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의 기분은 정말 우울할 것입니다.

가을빛은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온화한 눈빛이 세상을온화한 빛에 잠기게 합니다. 온화한 가을빛 속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가을 빛은 메마른 나무조차도 아름답게 만듭니다. 이런 아름다움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잘 보입니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온화함이 묻어납니다.

인생은 종종 나이가 지긋한 사람의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어 놓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인생의 굴곡을 통과했기에, 흔들림 없이 온화한 눈빛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그 어쩐 것도 전혀 낯설지 않지요. 또한 그들은 쉽게 판단하려 들지 않습니다. 마치 정지해 있는 것처럼 온화한 가을빛을 온몸으로 발할 뿐입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매 순간을 음미하려고 하겠지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 사실을 왜곡하려고 하기 때문에 삶이 새로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트의 수도자들은 정신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매일 죽음을 생각합니다. 슬픈 얼굴로 세상을 달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음미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인생을 사는 즐거움을 느끼려면 죽음을 연습하십시오.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알찬 인생을 가꾸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비밀이 남긴 자취를 쫓고 있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살아가고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에게 삶이란 어떤 느낌입니까?

유년기의 상처에 집착하면 좋은 삶을 꾸려나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엄격하게 자신을 길러준 부모를 비난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의식하며 살기 위해서는 유년기에 받은 상처와 이별을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단지 좋거나 나쁜 경험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상처 속에는 건강한 뿌리도 존재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모와 이별할 때 비로소 그 건강한 뿌리를 발견합니다.

안셀름 그륀 - 머물지 말고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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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사람들 생각 2011/12/12 06:52
모든 상처에는 흉터가 남는다. 
그 흉터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훈장이 될 수도 있고, 숨기고 싶은 창피한 흔적이 될 수도 있다. 
내 딸아이는 어릴 때 심장수술을 받았다. 
딸아이는 그 흉터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어느 날 나는 우울해하는 아이를 꼭 안으며 말해 주었다. 
“그 흉터는 바로 네가 큰 병을 이겨냈다는 징표란다. 
어린 나이에 그 큰 수술을 견뎌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서 난 네 흉터가 오히려 자랑스럽단다.”



- 김혜남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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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상처와 이별이 있는 이유는...

원준이 생각 2011/11/22 21:54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는다. - http://v.meson.kr/mbn2GX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말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부족함을 표현할 것이다. 

◈ 첫번째 에피소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도 힘들게 보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이 해야하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하는 것들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 늘 사람들로 부터 사교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큼 쾌활하고 유쾌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래서 그 사람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인상도 그늘 진 모습보다는 유쾌함에 묻어 나오는 선입견인지 사람들에게 호감을 더 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밝은 모습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 부터 상처도 많았다. 그 사람에게 그 상처는 항상 이겨야 하는 대상이었다. 어떤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솔찍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고백을 통해서 자신 만이 가지고 있는 짐이 덜어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아왔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두통에 필요한 진통제를 먹듯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위로를 받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큰 상처나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뭔가 풀리지 않는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 마치 진통제를 먹어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두통에 소화제를 먹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받지 못하면 그 관계의 본질이 이루어지지 않는 느낌으로 자신의 주변엔 자신보다 상처가 덜하다고 생각하거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을 모으게 된다. 


◈ 두번째 에피소드 

사람간의 이별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별이라도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별에 있어 그 이유가 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고의 현장에 아버지가 그 시간 그 곳에 있을 이유까지 찾을 수는 없다. 이미 끝나버린 이별에 매달리며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찾으려고 말이다. 연인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차이든(dumped), 차든(dumping) 항상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별의 이유라고 찾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를 하면서 과거의 상대방을 평가하며 상대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자신은 항상 옳은 판단과 행동을 하면서 살았지만 상대방이 모든 원인 제공을 했고 나는 참을만큼 참아보았고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라며 그 이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이별이 비참해지고 누군가 물어보는 '왜 이별했어?'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것 같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나는 이별을 통해서 성숙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며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위로와 감정의 동감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진실했고 그 진실의 반대편에 상대방은 항상 진실하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때는 다 이해했던 구체적인 행동들을 꺼내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하다. 상식이하라며 자신의 심미적 감정의 기준을 대어 하나하나 판단하며 그 큰 맥락이 결국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라 이별이 생긴거라 이야기 한다.




 
... 상처를 받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변명일 수 없다. 


스스로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본질적인 상처를 꺼내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대부분 상처를 받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과거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뿐이다. 그 누구도 나의 상처를 다른 이에게 완전히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부모의 학대를 받은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모여도 그 상처는 사람 수만큼 다르다. 아마도 같은 부모의 학대를 받은 형제남매라 할지라도 다를 것이다. 그만큼 사람은 상처에 대한 각기 다른 수용과 감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A 라는 아이는 그 상황을 탓하며 자신의 방이 없어 공부할 수 없음을 상처라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 B 라는 아이는 자신의 방이 없기 때문에 가족들과 살겹게 보낼 수 있다는 행복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상처란 절대적으로 이것이 상처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는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의 빗장을 열기 전에는 상처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넌 왜이리 못생겼어'라는 말 자체가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 들여 '내가 못생겼다' 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상처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로 잠시 넘어와서 자신의 상처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크게 두가지의 유형이 보인다. 첫번째는 그 상처를 통해 상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그 반대편엔 자신의 상처를 좀더 들어달라는 더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무리 힘든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이것이 상처다 저것이 상처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자는 자신의 상처와 항상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판단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대방이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해도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며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상처에 대한 비교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 남에게 상처주면서도 '나도 이정도 상처 안에서 살았는데...' 라며 남에게 쉽게 상처주곤 한다. 

이야기의 패턴은 항상 비슷하다. ① 나는 이런 상처를 받았다. ② 나름 많은 고민과 노력으로 성장하였다. ③ 다른 이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비교 분석한다. 상처는 치유하고 내적 성장을 위해 존재할지 모른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이해하라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남의 상처를 비교하고 판단하는데 사용한다면 그 상처는 하나의 독이 될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어야지 판단의 근거가 되서는 안될 것이다. 


... 자신의 진실함을 핑계로 상대방의 순수성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다. 


배려란 참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만나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두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둘 모두 자신의 이야기하지 못하고 참아오거나 두번째는 정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경우. 둘 모두 그리 정상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만난다는 것은 그래도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상대방을 통해서 나와 서로의 관계를 찾아가는 하나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시작은 그러한 서로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런 접점을 찾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사실 이별의 시작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든, 성격적인 이유든, 그 이유는 그냥 이별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일 뿐이지 대부분 자신이 기대치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클 것이다. 그 구체적인 항목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별또한 아픔이고 상처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헤어지고 서로가 남이 된 상황에서 가장 재밌는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상당히 객관적인 자신을 설정하고 이별의 이야기를 자신의 주변에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별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항상 진실해왔으며 상대방에 대한 상황과 행동을 자신의 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동의를 구한다. 나는 진실했고 여러가지 상황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사람 그때 그런 행동들은 정말 인간 이하의 행동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며 자신이 이별의 당연함에 동의를 구하게 된다.

대부분 자신의 행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에 맞춰 상대방을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고 그 대부분의 결론은 상대방은 원래 진실하지 못했고 상대방은 순수하지 못하다를 결론낸다. 그렇게 나쁜 경험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동정과 연민을 얻어내면 자신의 마음이 수월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런 소모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만남에서 자신은 진실하고 상대방의 순수성은 더럽히는 것이 자신이 이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노력한 내용들에 대해서 부연설명하며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순수성을 판단하면서 자신이 순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만에 가깝다. 이별의 순간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성찰만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착하고 진실하게 되기 위해 지나간 인연에 대해 순수하지 못함을 가쉽하는 그 행동은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찰은 토론이 아니다. 누군가의 동의가 이별에서 자신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외치면, 그 어떤 만남에서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을까. 이별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만남의 해소일 뿐이다.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이별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면 몇번의 상처와 이별을 통해서도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 판단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바라보는 기준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결국 몇번이고 실패라는 냉소만 쌓이고 고요함 안에서의 자신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동의만을 통해 잠시 아픔을 잊게 하는 진통제만을 먹는 효과일 뿐이다. 

자신의 상처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주며 다른이의 상처를 판단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하며 다른이의 영혼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묘하게 재미있는 교차점을 가진다. 그것은 침묵 안에서 들릴 수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듯 하지만 결국 다른 이를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많아도 다른 이를 위한 배려는 배우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이런  모습들을 지우기 위해 성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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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에서 자유로와지기

원준이 생각 2011/07/18 18:47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며 살아왔다. 그다지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 자부할 수 없기에 그런 시선들과 평가들이 무섭고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순간 그런 시선에 대해 신경쓰기 시작하면서 결국 가장 힘들어지는 사람이 나 스스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안에서의 두려움과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해결책 없는 걱정에 잠 못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을 느끼게 된 것 같다.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대학때도 학교가 가까워 재밌게 지내는 이성 친구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어느 날 학교 식당으로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예전에 자신이 미국에서 사온 인형을 가지고 나와달라고 했다. 아무런 걱정없이 다음 날 학교 식당에서 만난 그 사람은 이유도 영문도 모른 체 그 인형을 준비한 가위로 싹둑 싹둑 잘라버리고는 "너는 이 선물 받을 자격없어" 라는 말과 함께 그냥 가버렸다.

너무도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이유도 알지 못하고 그냥 "받을 자격없다는" 통보만을 받고는 그렇게 연락이 끊겼던 것이다. 사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 이후에도 그 일을 회자하면서 도대체 무엇이 이유일까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상담해 보아도 수많은 추측만 난무할 뿐이지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뿐이라는 점이다. 사실 몇년이 지나 공석에서 그 친구를 만날 기회는 있었지만 인형을 자르는 그 영상은 마치 반복되듯 내 머리에 남아서 그 친구 앞에서 계속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소심해진 내 마음의 벽때문에 그냥 물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가끔 그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잊은 듯 지내왔었다. 그러나 요즘에 들어 그 사건이후 얼마나 내가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시선과 반응에 혼자 힘들어하며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소심한 나로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그랬다는 소문 뿐만 아니라 별로 의미두지 않아도 되는 상대방의 시선과 태도를 생각하면서 내 스스로 여러가지 방어적인 추측을 가득하게 되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러한 방어적인 추측들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지 한숨이 나오곤 한다.

몇년 후 사귀게 된 외국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멀리 떨어져 있고 가치관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다투기도 하였지만 매일 안부를 묻고 잘 지내고 있었지만 어느 날 여자친구의 지인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어느 시점에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소문이나 가쉽에 항상  걱정하며 두려워하면서 살았던 내 소심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리는 가쉽은 마음을 스스로 힘들게 만들었고 그런 가쉽을 만들어내는 채터 혹은 가쉽퍼의 일방적인 혹은 과장된 내용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웃긴 사실은 그 반대로 여자친구에도 수많은 이간질과 저질스러운 블랙메일을 내가 보낸 것처럼 만들어서는 결국 나를 경찰서 조사까지 받게 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정을 정리하고 있어서 확실한 알리바이와 시스템 로그 분석으로 그 메일이 내가 보낸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해결은 했지만 더욱 더 진실에서 벗어난 그런 가쉽과 이간질로 내 스스로가 얼마나 속박되어 살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원망스러운 부분은 왜 미리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데... 라는 연락을 주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상해서 보낸 확인 메일이나 전화에도 제대로 대꾸조차 안하고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쓴 상대방을 생각하며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그런 소문과 가쉽에 얼마나 속박되어 살았었을까 하며 원망보다는 그냥 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기로 생각했다.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에 소극적이기 시작했던 나의 삶 안에서도 그런 대응의 모습은 직접 물어봐서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기보다는 그냥 혼자 추측을 하며 생각하고 그 생각에 어떤 구체적인 대처 방법도 제시하지 못한 체 그냥 속앓이만 하면서 살아왔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생기는 성격이 바로 소문과 남들의 시선, 판단에 민감해지고 나를 나쁘게 말하는 시선에 대해서는 억울함에 호소하며 방어하지만 결코 적극적이지도 않고 어느날 버스 안에서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는 때도 있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가쉽이 왜 같인 사실에 대해서도 꼭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지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적극적으로 잘 했다" 라는 말도 "어디 분위기 모르고 나대냐" 라는 말로 변하고 사실은 존재해도 그 사실에 대한 가쉽이나 시선은 결국 그렇게 남 이야기를 좋아하는 "가쉽퍼"의 기호와 판단으로 왜곡되기 쉬운데도 그 소문의 내용에 더 신경이 쓰이고 그 시선이 퍼지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며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내 맘대로 춤추고 싶어도 추기 힘들었고 뭔가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하지 못했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군중이 많아지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그 수많은 군중 모두에게 모나지 않는 사람으로 보여야 했고 그 시선의 자체 검열로 인하여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서 하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후회한 기억들이 쌓여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요즘도 그런 시선이 결코 맘에 들지 않는다. 교회 활동을 하거나 어떤 사회 생활을 하더라도 부딪치는 사람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시선과 그 사람들이 떠벌릴 수 있는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나에 대한 이야기가 두려웠고 그런 두려움에 결국 내 마음이 이끄는 삶보다는 그들의 시선이 불편하지 않은 모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 들어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나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시선들 때문이 아니라 그 시선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스스로 감옥을 만들었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인형 사건에서 나는 항상 '내가 어떤 잘못을 했을까'라며 나를 추궁했고 이간질에 의해 경찰서까지 갔다온 이후에도 '내가 무엇을 서운하게 했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그리고 내 맘에 안드는 소문들을 만들어 내는 가쉽퍼의 시선엔 그들의 성품을 비난하면서도 내가 정말 그런 모습이 있는건가 하면서 조심스러워지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의 기도를 통해서 느낀 하나의 교훈은 그런 편견과 삐뚫어진 시선을 가지고 소문을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코 좋은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삐뚫어진 시선과 자신의 욕심어린 편견에 만들어진 가쉽들에 의해 나같이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늘 알 수 없는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남들의 시선이나 편견 그들의 기호에 맞는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올바른 가치관에 신념을 가지고 행동 하나하나 순간 순간 행하는 것이고 혹여나 부끄러운 일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먼길을 돌아서 왔지만 이제는 그 누구의 시선이 두려워서 내 삶을 우회하지 않을거라고 다짐한다. 내 존재의 의미는 그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존재의 의미는 너무 쉽게 무너질 것이다. 내 삶의 기둥은 나 스스로이고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느끼던 그 시선의 두려움과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 대한 판단, 내 기호에 따라 누군가를 비난하는 굴레에서 탈출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다른 이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 법정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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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원준이 생각 2011/05/22 01:19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남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살찐 몸매에 불만을 가지고 그저 그 이유가 학업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지만 그냥 신앙의 한 부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 이성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 교회의 한 오빠가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을 그녀에게 고백하였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체 그냥 그렇게 머뭇거리다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동안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오빠는 왜 나를 좋아하는 것이지? 내가 어디가 이쁘다고 그러는 것일까?"
"내가 보아도 이쁜 구석이 없는데...." 


심한 고민에 빠진 그녀는 한참동안 고민을 했다. 

 

그 고민의 대부분은... 1. 나 또한 그 오빠를 좋아하는 것일까. 2. 그 고백에 대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보다는 도대체

 

"왜? 그 오빠는 어디가 나의 어떤 부분이 이쁘다고 하는 것일까?" 라는 고민이 대부분이 되고 말았다. 그런 고민 속에서 이렇게 못생기고 뚱뚱한데 왜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놀릴려고..."라는 소박하게 시작해서 나중엔 그런 생각에 휩싸여 심지어는 나를 사랑한다는 오빠에게 불쾌한 마음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 오빠는 가지지도 않은 순수한 사랑의 마음은 놀리기 위한 것이라고 그녀는 쉽게 평가하고 말았다. 그녀는 주변에 그 이야기를 가쉽거리로 이야기하고 말았다. 
 

"아니.. 세상에 그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나를 놀릴려고 그런 짓을 한것 있지..." 


결국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의 마음은 그렇게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다른 이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남이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게 허락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그 화려한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들은 상처받을 때 우리들은 너무도 일방적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며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수도 있는 상처가 되는 말들은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인간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자신이 만들었던 남이 만들었던 그 상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순간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사랑하며 나를 살피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다른 이의 어떤 터무니 없는 말이나 모함에도 쉽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며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라는 강한 자존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말도 안되는 평가를 받거나 나를 모르며 하는 이야기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면 남들도 내 말에 상처받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함부로 평가하는 말을 하지 않는지 항상 살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며 평가를 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남을 헐뜯고 험담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그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과정에 놓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다른 이에 대한 평가가 자신을 점점 헤치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모른다. 

 

어렵게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명제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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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

사람들 생각 2010/09/08 23:47
지배자 

인간은 내적으로 자유롭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있으면, 
즉 자기 중심을 가지고 서 있으면, 
어느 누구에게서도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어느 누구도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 안젤름 그륀의《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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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 상처,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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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처

원준이 생각 2007/04/0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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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에 거추장스럽게 달려있는 호흡기와 내 가슴에 흉하게 있는 스테이플러를 보고서야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 스테이플러 하나 하나 뽑아 낼 때마다 혹시나 수술 자욱이 터지지 않을까 조마 조마 하면서 하나하나 손 꼭 잡고 의사의 한동작 한동작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머니는 항상 말했었다. "크고 나면 성형수술로 다 지워버릴테니깐 걱정하지마" 

수술하고 나서 일년이 지나 수영장에 갔을 때 어떤 관리인이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손님 환불해 드릴테니깐 돌아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그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끝내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 가슴에 어쩔 수 없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이 흉터가 내가 하고 싶은 것조차도 못하게 만드는 그렇게 큰 죄의 흉터인가? 

지금은 전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그저 나의 일부분일뿐이다. 이젠 '아 내가 수술했었구나' 하는 어쩌면 잊고 지내는 나에게 다시 회상하게 만들어주는 표징이 되었다. 

이미 내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흉터가 흉찍하다거나 보기싫은 존재가 아닌 그저 아무렇지 않는 바로 그 나의 모습이다. 겉으로 보이는 그런 모습이 참 모습인듯 어쩌면 그런것처럼 남의 흉터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면 결국 자신의 마음속 흉터조차 보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우리가 걱정해야하는 건 눈에 보이는 흉터...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보이는 흉터가 아니라 남의 흉을 보고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하나 만들어지는 그 깊은 상처의 아물지 않는 마음을 봐야할 것이다. 

몸이 아파서 난 흉터는 보이지만 
맘이 아파서 난 흉터는 보이지 않지만 

하루 하루 다른 사람의 흉을 보며 나의 마음을 아프게, 흉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자... 그 흉조차도 사랑으로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 않게 만들어주지만 마음속의 흉은 성형수술한것처럼 치유되기 마련이다.

tags : 사랑,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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