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1/08/17 사람의 얼굴을 읽지 마세요.
  2. 2011/06/21 이기기 원하는가, 행복하기 원하는가.
  3. 2010/11/04 [내주변] '내' '주'변만이라도 '변'화시키기
  4. 2009/06/19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5. 2008/10/14 이유없는 무덤은 없나.. (1)
  6. 2007/03/19 이름

사람의 얼굴을 읽지 마세요.

원준이 생각 2011/08/17 17:41
심리학자 그리고 의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의 즐거운 표정, 행복한 표정에 대한 판단은 쉽게 내리지만 사람의 좋지 않은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은 쉽게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표정과 좋지 않은 감정이 섞인 부분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감정을 표정이나 카메라를 통해서 알아낸다는 것은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과학적일 수 있지만 현실적 혹은 실용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은 다양한 표정을 상황에 따라서 감출 수 있고 비록 감출려고 하는 연습이 서툴러서 제대로 표정이 안나왔을 때도 상당히 애매한 얼굴 표정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래 같이 살아오고 다양한 감정을 같이 공유한 사람이야 상대방에 대한 표정을 그래도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반응때문이다. 즉, 사람들마다 정확하게 같은 자극이라고 하더라도 그 반응의 차이와 방법은 다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전화, 인터넷 등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 대면하며 이야기하는 동안은 상대방의 얼굴 표정과 자신이 이야기 하는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전화 (물론 화상통화 제외) 를 비롯한 메세지, 메신저 등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전혀 보지 않은 체 대화해야 한다.  

판단이 곧 불행의 시작이라면 하고 싶은가? 


사람들은 자신의 대화 특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사람에게 더 민감하다. 상대방의 메세지 하나, 목소리 톤, 손짓 발짓부터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상대방이 어떤 감정이구나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심리적으로는 당연하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어떤지 살피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자신이 방어해야할 부분이 혹시나 있을까 하는 방어적이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엉덩이에 염증이 나서 불편한 자리때문에 찡그린 얼굴에도 혹시 내가 잘못 말했나 걱정해야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혀 감정적 반응도 안 보이는 문자 메세지도 몇번을 살피며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감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하고 자신에게서 해결이 안되면 수많은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지인들을 불러 자신의 문자를 보여주며 정답을 찾을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봤자 사실 불안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바로 본인 스스로이다. 사람의 관계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위해 그렇게 살피고 상대방의 얼굴을 읽지만 대부분 관계의 잘못이나 어긋남은 이런 잘못된 '얼굴 읽기(face reading)'의 단계에서 찾아온다는 사실도 재밌다. 우리가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헤어진 이야기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상대방을 이야기할 때 결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은 마치 나쁜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상대방인 듯 상당히 상세히 설명한다는 점이다. 즉, 이야기만 듣고 보면 상대방이 정확하게 절제된 단조로운 하나의 감정, 예를 들어 분노, 짜증, 미움 등의 형태를 잘 표현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은 당연하다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들을 때 나는 항상 물어본다. 상대방이 그런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한적 있냐? 그럼 대부분은 얼굴에서 보인다. 그의 행동에서 보인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감정의 표현이 잘 나타나 모두가 공감하는 상태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얼굴 표정이나 상당히 애매한 상황에서의 감정을 포착하여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http://blog.meson.kr/188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된 판단의 대부분은 정말로 사소하고 말도 안되는 것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스스로 불행의 길을 걸을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뭐 먹으러 갈까?"  
"응 아무거나..." (평소 잘 결정을 못하는 성격이고 이 날따라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 
"아무거나? 나랑 만나는데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거야? 그리고 왜이리 짜증내면서 이야기해" 

짜증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몰라도 사실 짜증을 읽어내는 사람의 기분과 기준에 따라 그 짜증의 정도는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가능한 얼굴에서 그리고 심지어 문자 메세지 등에서 상대방을 읽지 않도록 하면 어떨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외부 요소는 상당히 많다. 상대방이 얼굴이 안 좋은 이유는 당신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 

사람마다 감정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그렇게 읽은 감정이 별로 정확하지도 않다. 본인은 정확하다 확신한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확신은 결국 나중엔 불신을 위한 확신으로 진화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만 더 안좋아진다. 행복하고 싶으면 차라리 그 얼굴을 잊어버리자. 그래서 행복한 얼굴의 상대방 사진을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우리의 판단력은 자신이 믿고 이미 결정내린 사안들을 지지해줄 증거들을 수집하는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객관적 판단력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들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할려고 하고 옳은 일이다 잘못된 일이다 에 대한 판단을 먼저하자는 것이다. 소위 신념과 정의의 관점에서의 판단은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상대방을 읽고 상대방의 의도를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의 얼굴을 숨기기 or 보여주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런 표현을 해야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아니... 내 말은 내 뜻은 그런게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예절과 예의의 기준은 상당히 높고 까다로우면서 자신이 하는 이야기와 감정의 표현은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한 표현을 이야기해도 말꼬리의 높낮이 목소리의 높이, 톤 등을 고려해서 종합적 판단으로 상대방은 나를 미워한다 자주 결론을 내리곤 한다. 재미있는 일이다. 아무리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여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요소가 상대방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상당히 까다롭고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나 다툼의 화근은 대부분 문장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은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들이라는 점이다. 감정이 격해져서 상대방의 호칭을 "야..." 라든지 상대방의 부모를 "너희 부모" 라는 표현으로 정말 별 것 아니고 이해해주면 될 것 같은 요소들도 상대방의 귀엔 거슬리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문제는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전화, 문자, 메신저 등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런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수없이 Shift 키를 누르면서 이모티콘을 난발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능한 가까운 지인이라도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존댓말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감정이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도 있지만 비록 나의 감정이 나쁘다고 해도 일단 진정을 해야한다는 감추기의 기능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전화기나 컴퓨터에 나오는 상대방의 감정은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메세지에서 "아우 짜증나" 하면 짜증난 것은 알지만 그 짜증이 나에게 향한 것인지 아님 다른 사람을 향한건지에 대한 확신을 하기 힘들다. 서로 쉽게 비속어를 사용하는 사이라고 막역하고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감정이 엇갈리면 그때부터 서로에게 비속어를 상다방에게 쓰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이란 사람들과의 관계가 물 흘러가듯 거스름도 없고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얼굴을 읽어도 사실 제대로 읽은 적도 별로 많지 않고 특히 그러한 판단은 대부분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들이고 그런 나쁜 판단은 결국 엉뚱한 상상의 나래로 자신들을 괴롭히게 된다. 

대부분 나의 판단의 기준은 편협하고 너르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런 속 좁은 마음에서 다른 이들의 얼굴을 열심히 읽어도 나에게 평화를 주는 판단은 거의 없없다. 오히려 이러한 판단을 하려는 마음이 강해질 때 바꾸어 생각해보자 다른 이들도 나보다 너그럽지 못할 것 같다면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통신 생활이나 언어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신선한 미소를 줄 수 있는지 노력해 보는 것이 좋지 않알까? 

개인적으로는 호감이 안가지만 노홍철의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에는 어느정도 동감이다. 너무 과도하거나 부적절하게 웃으면 그건 분명 미친 놈 취급 혹은 비웃는다 판단이 들겠지만 최소한 평소 생활의 미소는 어두운 얼굴과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상대방에게 불편한 판단, 얼굴 읽기를 덜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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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기 원하는가, 행복하기 원하는가.

원준이 생각 2011/06/21 17:44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의 열쇠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만 없으면...", "저 사람은 왜 항상 저 모양이야..." 그렇게 대부분 자신의 화나 잘못의 원인은 내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있다고 얘기한다. 

위기의 부부들이 가지는 4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그 특징은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쪽에 있거나 도덕적이나 윤리적인 범주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은 오히려 감정적인 부분의 엇갈림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네가지의 특징은 

1) 비난하기 

"너가 항상 그렇지...",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해!", "너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무엇인가 시작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점이라고 부르는 것도 참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양말을 왜 아무데나 놓느냐 아니면 화장실 불은 왜 끄지 않고 나오냐는 등의 그런 생활 습관에 해당하는 일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습관적이기 보다는 순간의 실수를 비난으로 이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그 원인이 되는 일들이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당신은 왜 화장실 불도 안끄고 그래" (사실) "당신이 그렇지 맨날 그렇게 절약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해" (비난) 으로 이어지는 말과 

"당신 화장실 불을 안 껐내" (사실) "잊어버린 것 같은데 꺼주고 나오면 안되어요" 이라며 비난적 요소가 사라지면 오히려 내가 불을 안 껐구나 하는 부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다음 번에 그런 일들이 더 잘 상기될 것이다. 오히려 비난이 가해지면 화장실 불을 끌때마다 그 비난이 떠오르며 "내가 절약정신이 없다고? 아니 도대체 누구 돈으로 먹고 사는데" 하는 마음으로 비난에 대한 자기 방어적 요소가 더 떠오르게 될 것이다. 

2) 경멸 

비난의 단계가 반복되거나 심해지면 어떤 행동이나 사건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이나 상대방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내용을 거론하며 경멸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상대방의 잘못이나 실수는 경멸을 위한 시작점일 뿐 중요한 건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미움을 포함한 원색적인 내용을 이야기 하기 마련이다. 

비난의 단계는 그냥 훈계나 일이 잘 되기 위한 하나의 합의를 위한 부분이지만 경멸의 단계에서는 상대방이 화장실 불을 꺼도 모든 것을 제대로 해도 흐트러진 수건이 맘에 안들면 상대방에 대한 경멸을 보이게 된다. 

어떤 말이나 행동도 다 맘에 안들고 이런 경멸의 단계에 들어서면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경멸에 의한 서로간의 상처로 인해 이전에 사랑했던 모든 기억과 추억이 다 거짓이 되어버리고 사람 자체에 대한 증오로 인해 자신의 삶마저도 잃어버리고 삶에서 행복을 느끼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이 경멸의 반복으로 인해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3) 자기 방어 

자기방어와 경멸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경멸하는 상대방이 논리적이나 감정적으로 옳다고 생각할 수 없는 단계에서는 상대방의 경멸에 대해서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인정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나에겐 잘못이 없고 상대방이 너무 극단적이고 일반화된 시각으로 나를 바라본다는 느낌이 들 때 상대방이 잘못되고 나에겐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 언성은 높아가지만 실제로 합의에 이르거나 어떤 평화의 방법을 찾아내기 보다는 서로의 귀는 막아버리고 나의 이야기만 줄기차게 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서로가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바라보는 시선이 잘못되었으니 원인은 너에게 있고 너가 고쳐야 한다고 하는 원인 제공에 대한 분명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되면 될수록 자신의 주장은 항상 맞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자기 방어로 시작하게 되지만 사실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상대방이 질 때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서로의 시각은 평행선을 긋게 되고 반복되고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계속 싸우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바로 결과 / 과정에 대한 합리화이다. 결과가 잘못되어도 과정에서의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하고, 과정이 맘에 안들면 결과가 좋아도 과정에서의 잘못됨이 문제가 되기 마련이다. 결국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심한 하소연과 자신을 지키고 싶은 자존심의 문제가 반복되어서 답답한 마음에 상대방에게 소리지르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상대방도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4) 무시  

자기 합리화의 과정이야 연인들 사이에서는 그냥 헤어지면 해결될 수 있지만 부부의 삶을 살고 있고 아이가 있는 상황이라면 평행선을 그으면서 살아가다가 결국 무시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서로 어떻게든 잘해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던 그 단계에서 이제는 무관심으로 이끌어지면 서로에 대한 애정은 냉냉하게 식어버리고 서로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그리고 상황이 맞는다면 언제든지 이혼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무시의 상황에서는 어떤 해결을 위한 서로의 노력보다는 어떻게하면 피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정적인 활동에 점점 힘을 쏟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부정적 활동은 스스로도 더 힘들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특징이 자신의 관계가 비정상적이고 부정적인 관계로 가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이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새로운 시각을 보아야 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일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대답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이기기 원하는가? 행복하기 원하는가?"

상대방을 대한 나의 태도가 사랑의 표현이고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위의 질문을 하게 된다면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행복하기 원한다고 할 것이다. 내가 상대방의 허물과 실수를 밝혀내 상대방을 원래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상대방이 대꾸할 수도 없는 논리로 이기게 된다면 정말 나의 마음은 편하고 좋을 것인가? 결국 당신은 승리자가 되었지만 상대방은 패배자가 되기 마련이다. 반대로 내가 패배자가 되고 상대방이 승리자가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결국 그 누군가는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이 패배자가 되길 바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기 방어하는 사이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한 노력은 절대 아닐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희생해가면서 누군가를 그렇게 패배자로 만들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당신의 모습 하나하나를 비난하고 항상 자기 합리화에 상대방을 패배자로 만드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가장 현명한 방법은 헤어지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은 한 사이라면 그리고 도저히 해결책이 없을 것 같아 헤어진다고 해도 사실 문제는 반복되기 쉽다. 왜냐면 문제가 나에게 있지 않고 상대방에 있다는 믿음때문이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도 똑같은 문제에도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또 비슷한 사람 만났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상대방이 패배하는 순간을 바라보며 희열을 느낀다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희열은 결코 사랑이 아닐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이 힘들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는 것이지 어퍼컷을 날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상대방을 비난, 경멸을 하며 자기방어를 하고 심하게 되어 결국 서로에게 무관심한 상태까지 가게 된다면 그 책임과 원인 제공은 상대방에 있다는 파렴치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결국 서로 패배자로 만들려고 하는 그 수많은 노력 속에 지치고 힘들어진 나와 너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때문이다. 


언제나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 

이기기 원하는가? 행복하기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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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주변] '내' '주'변만이라도 '변'화시키기

일상 다반사 2010/11/04 16:03
내주변이라는 프로젝트... 

어린 시절 내 힘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능력이 좋아서도 그리고 처음부터 영향력있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패기와 열정으로 세상은 바뀌어지고 내가 원하고 그렸던 세상처럼 바뀔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지금은 이미 세상이 그렇게 작은 공간도 아니고 아무리 옳은 일이고 정당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대로 모든 사람들이 따라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리고 오히려 사람들은 정의나 바른 일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먼저 추구하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라는 것을 매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리 쉽게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알고 느끼는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내 버려두자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느 한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너무도 쉽고 너무도 간단한 사실을 깨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내 주변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가지는 바른 생각과 행동을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범위라도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지는 생각을 그저 작은 범위에서라도 이야기하고 그것에 공감된다면 그리고 그 공감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그래서 '내주변' 프로젝트를 통해서 내가 지나오는 그 삶의 거리에서 보고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을 삶의 오묘함과 즐거움을 한번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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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원준이 생각 2009/06/19 02:43
우리는 죄의 경감을 옹호할 만한 증언을 통상적으로 무시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확신한 후에
그에 위배되는 증거들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진리라고 불릴 만한 것 중에서 이런 식으로 도출된 진리는 없다.
- 마릴린 로빈슨, 「아담의 죽음」

사람들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일단 판단을 하고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살아온 길, 그 사람이 말하는 태도, 그 사람이 행동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요소들을 판단하게 된다.


"저렇게 말하는 것 보니 저 사람은 무척이나 무례한 사람이야"

"저런 양복을 입는 것을 보니깐 꽤 사는 사람인가 보네" ... etc...

수많은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판단하고 그 판단의 근거를 살펴보기보다는 그 판단은 곧 바로 다른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재밌는 부분은..

① 이차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는 판단이 정말 사실인가?
② 이차적인 판단에 반대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은가?
③ 감정적인 판단에 의한 일반화의 오류는 존재하지 않는가?

CASE) 연인 사이인 영숙이와 영달이는 오랜 기간 교재해온 사이이다. 같은 학교 캠퍼스 커플인 둘은 좋을 때는 서로 없으면 안될 정도로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로 알고 싶고 서로가 무엇하는지 궁금해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이였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즐거운 것을 함께 하는 그런 사이였다.

어느날 캠퍼스에서 혼자 걷고 있는 영숙이에게 돌팔이라는 학생이 영숙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쫓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잠시 시간을 내달라는 돌팔은 영숙의 앞을 가로 막았고 그 순간을 멀리서 우연히 보게 된 영달이는 멀리서 영숙과 돌팔이 서로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를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영숙이가 어떻게 저렇게 "웃는 얼굴로" 모르는 사람에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 "저 사람 영숙이랑 무슨 관계이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영달이는 자신이 보는 모습중에서 자신이 순간 느꼈던 가장 기억이 나는 판단을 떠올리게 된다.
"웃는 얼굴로"

웃는 얼굴을 기본으로 영달이는 영숙이를 정의하기 시작한다. "영숙이는 낯선 남자에게도 잘 웃어주는 여자구나"

그 이후에 영숙이와 영달이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영숙이는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 영달이 친구 순돌이가 하는 얘기에 흥미를 느껴 잠시 집중을 하게 되었다. 영숙이가 흥미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했고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집중하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영달이는 또 판단하게 된다.

"아니 어떻게 남자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나에게는 관심도 없이 저렇게 낯선 남자에게 집중하면 있을 수 있는거야?" 그러면서 순간 예전의 판단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논리와 판단을 확장시킨다. "낮선 남자에게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는 아이가 바로 영숙이였지..." 원래 저런 아이니깐 저런 모습도 당연한거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술자리 이후 데려다 주면서도 영숙이에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고 예전같은 모습을 안 보이는 영달이가 이상해 영숙이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 영달은 자기 잘못도 모르면서 저렇게 태연한지 원래 그런 여자임에 틀림없다 확신하게 된다.

그러다 의심은 심해지고 전화를 받지 않거나 집에 늦게 들어가는 영숙을 보면서 낯선 남자에게 잘해주듯 다른 남자 만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의 골은 깊어지기만 한다.

처음부터 살펴보면

웃는 얼굴에 대한 사실 여부에 대해서 확인하지 않았으며
(사실은 어이없는 황당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는데...)
낯선 남자에게도 잘 웃어주는 여자라는 인격에 대한 도약적인 판단을 하였으며
(잘 변하지 않는 성격으로 고정화)
개연성이 없는 다른 사건을 기존 잘못된 판단을 통해 보이는 모습은 편협하게 보일 수밖에 없으며
처음부터 잘못된 사실에 대한 더욱 더 강한 확신을 만들게 된다.
결국엔 의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비이성적 비인격적 행동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역설하게 된다.
(잘못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제공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판단은 완벽한가? 충분한 근거와 변할 수 없는 진실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설사 제대로 된 판단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제대로 된 판단을 믿어 서로 관련이 없는 일에서 자신이 보고 싶어하고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증거만을 위한 편견의 안경으로 쓰는 것은 아닌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판단을 해서 실제로 이성친구의 바람피는 것을 찾기도 하지 않냐고... 의심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난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그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마 작은 실수나 의도하지 않은 행동안에서도 의심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중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은) 상대방이 실제로 그러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너 자신이 정말 행복하냐는 것이다."

상대방을 떠나서 의심과 의혹 혹은 자신이 바라보는 나쁜 모습의 상대방을 두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 정말 너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관계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것은 부족함이나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믿음과 신뢰의 안경을 통해서 그 부족함과 실수의 굴레에 속박되어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의심과 판단의 안경으로 바라보면 결국 자신에게 표현하는 서투른 사랑의 표현조차도 자신의 정의에 움직이는 불편한 행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g.) 뜻하지 않은 꽃다발은 분명 바람을 피고 있다는 증거이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판단하며 상대방을 정의하며 그 정의된 Profile 에 맞추어 살아가는지 확인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100의 사람이 100가지 경우가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은 아마도 100,000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 이상 수많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100인의 사람이 그때 가지는 감정, 환경, 그리고 상태에 따라서도 다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만 우리가 취하기 좋은 증거만을 수집하고 기억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적인 수집은 사실 그렇게 호의적인 판단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그 판단은 쉽게 의심의 눈초리와 감정의 상실감을 주기 쉬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은 우리가 분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판단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고 만약 부정적이라면 그건 자신을 위해서라도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영화 Doubt (2008) 에서 아동동성애를 의심하던 수녀님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신부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아동동성애에 시각을 맞추어 결국 확신을 하는 과정을 심리적으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그런 의심을 설득시킬 수 없고 의심으로 힘든 상황에서 강론을 통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느 마을의 두 여인이 앉아서 동네사람 아무개의 흉을 봤답니다. 가십(gossip)을 한거죠. 그냥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의 흉을 봤겠지요. 그런데 두 여인중에 한 사람이 그날밤에 꿈을 꿨는데, 하늘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오더니 검지손가락으로 그 여자를 정확히 가리키는겁니다. 상상해보세요. 하늘에서 큰 손이 내려와 정확히 내 면전에다 대고 가리키는 겁니다. 꿈에서 깨어난 여인은 꿈에 대해서 생각해보다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개 흉본것을 하느님이 아시고 야단을 치러오셨나봐. 그 손은 하느님의 손인가봐.. 여인은 신부님에게 찾아가 고해성사를 합니다. 
"신부님 제가 아무개 흉을 봤는데 꿈에 큰 손이 내려와 저를 비난하듯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저의 죄를 사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부님이 여인의 이야기를 듣더니, 여인에게 숙제를 내 줍니다.
"집에 가서 당신이 베고 잔 그 베게를 들고 지붕위로 올라가서 칼로 베게에 구멍을 내시오. 칼로 베게를 구멍을 낸 후에 다시 내게 오시오."
여인은 신부님이 일러준대로 합니다. 그리고 다시 신부님에게 옵니다. 
여인: 신부님, 신부님이 일러주신대로 베게를 지붕위로 가지고 올라가서 칼로 찢어 구멍을 냈습니다.
신부님: 베게를 찢었다면...무슨 일이 일어났소?
여인: 베겟속 깃털들이 모두 흩어져 날아갔습니다.
신부님: 이제 당신의 죄를 사할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소. 가서 깃털들을 모두 모아다가 그 베게를 다시 채우시오.
여인: 신부님, 그 깃털들을 어떻게 다시 모을수가 있나요 천지사방으로 모두 날아가버렸는것을...
신부님: 네가 한 짓이 바로 그와 같도다! 네 말을 어떻게 되 담을수가 있겠느냐! 네 죄를 어떻게 씻을수가 있겠느냐!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그 확신이 당신의 불행을 가져온다고 하여도 당신은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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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없는 무덤은 없나..

원준이 생각 2008/10/14 01:55
일년전쯤 같은 종교의 사람들이 하루동안 모여서 서로의 경험과 일상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 살아가는 모습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값진 기회였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의 얘기가 오늘 갑자기 생각났다. 
 
어렵게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을 다니고 있고 남동생 한명과 여동생 두명의 학비까지 책임지고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계시고 어머니는 파출부일로 돈을 벌어가는 그 누가 보더라도 "불행하게만 보이는" 가족이었다. 
 
이런 집안 사정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한 배경을 모르고 만났을 때 처음 그 아이의 첫인상은 항상 입가엔 웃음이 있어 보조개가 항상 보이는 그런 참 이쁜 아이였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근심 걱정하나 없이 살아가는 그런 아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 미소는 참 깊고 인위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이중섭 作 - 가족과 비둘기



"저는 태어나서 한번도 제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6명의 가족들이 항상 한방에서 살아야 했어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예상했다. 아... 그래서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나보다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다음의 이야기는 스스로 부끄럽게 하기 충분하였다. 
 
"그래서 전 너무 행복해요. 남들은 느끼지 못할 가족들의 소중함을 항상 느낄 수 있고 누구 하나 아프더라도 항상 옆에서 서로 위해줄 수 있고 가족들 사이에 벽이 하나도 없어서 매일 혼자 기도하지 않아도 되고요. 그래서 주님께 너무 감사드리면서 살고 있어요." 
 
그 아이의 얼굴엔 그저 행복만이 있었기에 그 말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나는 학교에 복학하면서 적응하기 힘들정도로 살찐 외형때문에 반 학우로부터 여러가지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내 속사정도 모르고 저러는 사람들이 너무 싫었고 부모님에게 학교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그런 선택을 생각해보라는 부모님에게 성질내면서 이렇게 외쳤다. 
 
"지금까지 삐뚤어지고 안 자라온게 어디야!" 
 
마치 자랑인양 얘기했던 그 말은 아직까지도 가장 가슴아픈 말이구나 하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에 뭐만 있으면 좋을텐데...', '돈만 조금 더 있으면 좋을텐데...', '다 좋은데 이것만...' 많은 이유를 달면서 현재의 상황이 나에겐 최선을 다할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를 붙이고 싶어합니다. 


행복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찾아가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은 이 것때문에 불행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상황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때문에 행복하세요.
무엇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불행은 당신의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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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 가족, 사랑,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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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원준이 생각 2007/03/1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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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수많은 간판들 속에서

이름을 보며 생각해봅니다.

자신이 그리던 그 어떤 가게의 이름을 보았을 때

소리치는 그 목소리와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어느새 당신의 이름은 나에겐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내 기억속에 들어오지도 못했을텐데

그랬다면 얼마나 많은 미소를 잃어버렸을까요

그래서 나에게 당신의 이름이란

잃어버린 내 행복의 반을 차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복의 반은 이미 이름에서 시작합니다. 그 믿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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