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통한 믿음 - 강영구 신부

사람들 생각  |   2012. 6. 3. 04:05

늘은 부활 제2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의 주인공은 당연히 의심 많은 토마 사도입니다.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 사도는 감각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으려고 하지 않던 의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만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하자, 그는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은 제자들조차도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더구나 의심 많던 토마 사도에게는 그토록 무참히 십자가에서 죽어 버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각적인 증거를 요구하게 된 것이고, 그 요구가 충족되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토마 사도의 불신을 씻어 주시기라도 할 양으로 여드레 후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토마 사도에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셨습니다. 토마는 그 때 비로소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쉽게 믿지도 않지만, 한번 믿으면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기는 토마 사도의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토마 사도의 이런 태도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눈과 코와 귀와 입과 손, 즉 오관(五官) 혹은 오감(五感)이라는 것 자체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능이라는 것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혹은 기분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릅니다. 그뿐 아니라 똑같은 사물을 놓고도, 사람에 따라서 흑은 시각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어떤 사람은 맛이 있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맛이 없다고 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좀 맛이 없는 음식도 맛이 있게 느껴질 것이고, 배가 부른 사람에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별맛이 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름에는 얇은 옷도 몹시 덥게 느껴지지만, 겨울에는 두터운 옷도 별로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감각 기능이라는 것은 불확실할 뿐 아니라, 잘 변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하는 우리의 감각기능이 확실한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속는 사람이나 사기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속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도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그리고 다짐을 받고도 속기도 하고, 사기당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만큼 우리 인간들이 지닌 감각 기능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변덕스럽고 또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감각 기능을 통하여 믿음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함으로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감각 기능은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을 줄지는 몰라도, 감각 기능으로 믿음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구나 믿음은 자신의 운명과 삶의 모든 것을 바치는 행위인데,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함으로써 그 믿음을 얻겠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고 또 우리 사회에 불신 풍조가 만연해서 그런지, 흑은 하도 속으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무엇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곳곳에서 성모님이 나타났다느니, 성모님이 피눈물을 흘리신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상한 일들을 비디오로 촬영해서 보여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래도 믿지 못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이상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충격을 주어서 믿음을 가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이상한 사실을 눈으로 보고 믿음을 가졌다면, 그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감각 기능을 바탕으로 해서 얻게 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하는 감각 기능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수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리고 확인한 후에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매순간을 불안과 근심 걱정 가운데서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실수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확실히 처리하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이 다리가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매사를 불신하기에 의심의 눈초리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입니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하느님의 영(靈), 곧 성령(聖靈)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영의 부르심이며,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슴을 닫고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손으로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믿음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불신하는 마음을 지니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손으로 무엇을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한다 해서, 믿음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불신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아무리 눈으로 흑은 손으로 확인을 시켜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가슴을 활짝 열고 하느님의 영의 부르심에 웅답할 때 비로소 믿음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증언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평화란 믿음을 지닌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고뇌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고뇌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은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불안에서부터 벗어나서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의 사도 행전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사실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무렵 사도들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 베풀었다. 모든 신도는 한 덩어리가 되어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도들의 모임에 끼여 들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효가 늘어났던 것은, 바로 신도들의 삶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그 평화스럽고 사랑하는 삶의 모습이 그 무엇보다도 힘있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의 부활 사건은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2천 년 전에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분이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지금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불신 속에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증거를 요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불신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는 형제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의 평화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토마 사도와 같이 주님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이 주는 평화를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고뇌마저도 극복하고 사는 우리의 그 삶의 모습, 주님 안에 하나로 일치되어서 살고 있는 모습, 그리고 서로 형제와 같이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부활에 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칭찬하였으며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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