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믿는 사람들은...
원준이 생각 2011/09/19 05:16아무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인식
'믿음'에 해당되는 글 4건신을 믿는 사람들은...원준이 생각 2011/09/19 05:16아무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인식
그러나 그것을 한계라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발전한다.
겸손을 가진 발전은 그래서 사람들을 아름답게 살게한다.
죽음의 결정은 내가 할수 없다는 유한에 대한 인식
그러나 그것을 유한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성으로 희망한다.
숙명을 가진 이별은 그래서 사람들을 아름답게 죽게한다.
할 수 없음에 안타가워 해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할 수 있음에 자만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음은...
유한한 삶에 대한 겸손함과
죽음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교체해 흐르는 그 교차점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감한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신앙사람들 생각 2010/10/06 05:29연중 제27주일 루가 17,5-10 (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신앙
묵상 :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참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으로 생각했다. 죽음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불가능이 없다. 최소한의 의무만을 하면서 크게 생색을 내는 것은 참 신앙이 없다는 증거다.
뽕나무나 산을 옮기는 믿음
오늘 예수님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며 청하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하신다. 다른 복음에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스완쿼트라는 마을에 1874년 성당이 세워졌는데, 신자들은 원하는 자리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고, 그 근방 다른 자리에 성당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땅 주인이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원하는 자리에 성당을 세우지 못하여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당을 짓고 헌당식을 가진 지 2년이 지난 1876년 9월17일 엄청난 폭우와 폭풍이 그 지방에 몰아쳐 성당은 폭풍우에 90여m나 떠밀려, 신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자리에 정확하게 옮겨졌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으로 성당이 이사를 하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땅 주인도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성당 이름도 ‘하느님의 교회'라고 바꾸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107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 콜로세움(원형극장)에서 사자 밥이 되어 순교하셨다. 성인은 스미르나의 주교 성 폴리카르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단 한가지 하느님께 바치는 내 피의 봉헌을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밀로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되기 위하여, 짐승의 이빨로 고운 가루로 갈아지기를 바랍니다"하며 순교의 열망을 피력하셨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을 새 생명의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영광의 순간으로 여겼다. 수많은 신자들을 사자 우리에 처넣은 네로 황제는, 달려드는 사자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가를 부르며 태연히 죽음을 맞는 그들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영광으로 여기며,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이렇게 신앙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교회사 안에서 보게 되는 수많은 기적적인 사건과 상상을 초월하는 신앙의 승리는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런 신앙의 힘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무신앙적인 적반하장
오늘 복음은 언뜻 보기에 신앙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대로 다 실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나서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고 말하라고 하신다.
우리 주변에는 가정을 알뜰히 돌보면서 평일미사는 물론, 레지오나 신심단체 활동을 통해 환자 방문과 전교, 본당행사 때의 노력봉사, 피정 참여 등에 열심한 신자들이 많다. 그리고 많은 후원회에 가입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신자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고 신앙 안에 겸손해하는 이들을 본다. 그런가 하면 평소엔 냉담을 하고 있다가 부할이나 성탄 때 판공성사만 겨우 보고 또다시 냉담을 하면서도 “그래도 판공성사 봐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식으로 적반하장인 대축일 신자도 적지 않다.
그리고, 어쩌다가 작은 봉사라도 하면 동네방네 떠벌리며 자기자랑을 하는 이들도 있다. 신앙적인 자세가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이해타산적으로 보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찌들은 이들에겐 봉사활동은 ‘노동력 착취'요 감사헌금은 ’금품 사기'정도로 보일 것이다.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그들의 시야는 이 현실 안에 갇혀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하느님, 당신은 내 삶에 끼여들지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하는 자세로 하느님을 실생활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상 자신의 얄팍한 계산으로 살아갈 뿐이기에, 죽는 날까지 결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앙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믿는 만큼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신앙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고 하셨다. 우리도 이 미사 중에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자.
어느 신부님의 강론 내용 중에서...
신이 준 선물원준이 생각 2009/02/02 01:19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와 반대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이유를 접할 수 있지만 참 신기한 점은 다음과 같은 점이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그것은 결국 자신이 경험하고 받아들이 가치관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심한 고통 속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심한 고통을 인간에게 준다면 그것은 신이 없을 것이라는 증거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현상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각자의 다른 이야기와 이유를 통해서 신을 부정하고 신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이다. 용산 참사를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이질적인 삶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이는 이렇게 외친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비극을 만들었을까?" 참 간단한 물음이다. 신이란 일반적으로 항상 선(善)하고 옳바른 정의의 편에서 서는 그런 수호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야기로 놓고 본다면 이런 상황에서 외치는 신이란 비극적인 현실에서 다가오는 그 참혹함과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해결될 수 없기에 대신 이 세상을 한탄하게 만드는 하소연의 대리인 성격이 더 강할 것이다. 난 신이 존재한다고 기본적으로 믿고 있다. 어느날 역사학자가 역사적 고증을 통하여 예수님은 다 꾸며진 이야기이고 그 꾸며진 이야기 속에서 이룩되어진 교회를 믿는 것도 근거가 없다고 누군가 주장하고 공격한다면 정말로 충격과 심한 혼돈 속에서 지내게 될 것일까? 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성과 신학의 안정성은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죽음, 십자가의 형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근간을 통한 신학이 우리 일반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마저 갑자기 뽑아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롭고 정의로움이 결국에 웃음을 얻어내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귀결된다는 믿음을 주고 그러한 믿음이 극도의 악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심이라는 작용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사회는 적어도 훈훈한 인간의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중에 하나는 정의(Definition)되지 않은 선에 대한 기준이라는 점이다. 그 선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신비한 작용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어떤 행동적 규범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대교의 율법이나 강력한 종교의 가르침과 규율은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이자 반대로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예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율법과 규율이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종교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가톨릭의 교리안에서는 말이다. 가톨릭 안에서도 많은 규율과 규범이 존재하게 된다. 주일엔 미사에 참여해야 하며 일년에 두번 이상은 고백성사를 보아야 하는 등의 다소 귀찮고 까다로와 보이는 그런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규율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하기도 하다. 신에 대한 예의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왜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오면 (회계하면) 된다는 단서를 통해서 인간의 잘못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규제하고 억압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에 대한 많은 갈등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가지는 갈등과 자유 의지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정립은 그만큼 중요하다. 종교가 아닌 다양한 논리와 강한 신념을 통한 가치관의 성립에 대해서 누가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형성과정과 그 가치관의 증명은 때로는 이기지 못한 심한 좌절감과 패배감을 줄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무엇이 인간에게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는지에 대한 짧은 소개를 하는 것을 난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그래서 어린 시절 종교에 대한 다소 강제적인 배움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제공해준다.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 놀 수 있는 공간, 같이 느낄 수 있는 기회 등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규범같이 느껴지는 종교의 규율성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이나 의지가 때로는 꺾어야도 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때문에 그 범주의 굴레 속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갈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때 그런 종교의 교육성과 신의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모순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이 고통을 느낄만큰 갈등과 심한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 반대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신에 대한 존재론적 논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1) 신이 존재한다. 2) 신은 사랑이다. 3) 신은 인간이 행복해지고 평화롭기를 바란다. 4) 현실은 고통과 불평등과 약자는 항상 당하기만 한다. 5) 고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름 논리적인 이 과정을 통해서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이상과 신의 기능을 나름대로 정의하게 된다. 모순적인 결론이지만 난 신이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정의(definition)되지 않은 정의(justice)'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현실이다.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신의 기능성으로 나타나지는 이 세상의 평화와 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얻을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쉬운 인지 과정이다. 신은 인간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게시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그러한 특별한 기적의 기능성은 그리 길지도 생각보다 효과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기적은 이 일상의 소소한 작은 느낌에서도 다가온다는 것은 이미 신의 기능성에도 별로 불만이 없는 상황이다. 우리가 숨이 붙어 살아갈 수 있는 확률적인 계산이 그리 높아보여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적의 소소함은 우리가 감사라는 기능으로 보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의 소소한 숨결의 기능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은 우리에게 무엇이 선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무엇이 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예시를 주는 것이다. 만약 신이 정의된 정의를 우리에게 주었다면 우리는 참 쉬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의에 부합되지 않으면 부합되게 노력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방향은 때로 원대한 선의 기능으로 우리가 믿고 가도 남에게 뜻하지 않은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신이 주신 탈렌트(talent)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신비한 능력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을 어떻게 쓰고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가의 문제는 바로 자신의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만약 정말 정의된 선에 의해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좀 다른 의미로 부여되었을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자유의지로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신을 부정할 수 있는 의지까지도 허용하신 점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인간은 다양한 가치관과 가치의 혼재와 타협을 통해서 선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삶을 비추어 성찰이 필요성은 이러한 다양한 가치의 혼재에 근거를 두게 될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랑하고 그 결과에 대한 냉혹한 심판보다는 스스로 회계할 수 있는 기회까지 부여하셨기에 인간은 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두고서라도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이 선에 대한 기준을 부여했다면 인간의 고민은 간단하다. 기준에 부합되느냐 안 되느냐이다. 그러나 신은 그 기능을 포기(?)하여 더욱 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인생을 만들었던 것이다. 살인하다 / 도와주다 / 잠자다 / 사랑하다 / 행복하다 / 놀다 위에 제시된 단어중에 인간의 선함을 나타내는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도와준다는 의미만 놓고 보면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통해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챙길려고 하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러한 예들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행동에 대해서 착하다 나쁘다 판단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원론적으로 보았을 때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선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행동했느냐 하지 안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그렇기에 개인의 가치관은 행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행동 그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하다. 우리 사회에서 선의 기준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선뿐만 아니라 논리, 이성적인 행동의 기준은 바로 자본이 되어버렸다. 자본의 논리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자신의 건물의 세들어 살던 세입자들이 내 몰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얘기한다.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에겐 돈을 더 줄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 용산의 참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참 안타가우면서도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참혹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오히려 인간의 세상은 명확해지는 기준이 존재하면 할 수록 다양성은 왜곡되고 인간미에 근거해서 받아들이긴 힘든데 받아들여야 하는 안타가운 현실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요즘 아이들의 기준은 명확하다. 자신의 미래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떤 아이들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 아이들에겐 간단한 삶이다.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길에 포함되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목숨도 쉽게 포기해버릴 수 있는 잘못된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신이 인간을 참 많이 사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지전능하시기에 이렇게 해 명령을 내리면 신을 믿는 자들이야 기꺼이 따를 것이고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야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으니깐 잘못되어도 "거봐라.." 하면서 소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더 쉽게 이룰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기준과 기호에 부합되는 인간의 사랑보다 신이 얘기하는 사랑의 향기는 더욱 더 힘들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하는 땀의 냄새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너무도 사랑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여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 그것이 자본의 논리로 인간의 인성과 인권이 무너지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가 지켜야 하고 전해야 하는 강한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믿음에 대해서원준이 생각 2007/08/14 13:03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서 연수를 다녀왔다. 연수원에 들어가서 하루 일과란 아침에 일어나 체조하고 아침 기도를 드리고 아침 먹고 신부님 강의듣고 다시 점심 먹고 그리고 강의듣고 그리고 가끔의 색다른 프로그램도 경험해보고 그리고 저녁먹고 기도하고 미사드리고...
핸드폰, 시계 세상의 시간을 알 수 있는 도구들은 첫날 미사시간에 봉헌드림으로 사라졌기에 시간의 감각을 알기에 쉽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런 고민들은 첫날에 끝나버리고 오히려 그 시간의 무지가 잔잔한 평화처럼 느껴지는 그런 시간들이 다가오기 시작했었다. 오히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시간에 얽매여 살아가던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연수생들중에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계셨다. 카톨릭이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지 않아서 종교의 활동이 심하게 억압당하는 중국 북경에서 오신 수녀님, 연수 생활 내내 수녀복이 아닌 우리와 똑같이 평상복(사실은 중국옷이었지만)을 입고 다니면서 연수생활을 하셨고 그분을 따라 온 북경에 있는 청년들도 왔었다. 그리고 시력을 잃어버려 앞을 볼 수 없는 형제분도 한분 같이 참여를 하셨다.
연수 내내 나를 괴롭혔던 주제는 '믿음'이었다. 어떤 믿음이 진정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느님을 어떻게 따르는 것이 어떻게 믿는 것이... 이런 주제로 나름대로 머리로 고민하던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한 장면이 나를 사로잡게 되었다.
그 시력을 잃은 형제님은 동료 형제님의 손을 붙잡고 이동하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장애우 형제님이 다른 형제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렇게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어리석게도 전혀 다른 상황에서 그 당연한 모습을 인지할 수 있었다.
새벽이고 모두가 잠든 밤. 볼 수 없어 벽을 잡고 누군가 혼자서 이동하는 희미한 모습과 이곳저곳 다른 이들의 짐을 지나가는 모습, 그리고 결국 굳게 닫혀 있는 페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잠에서 깨고 말았다. 한동안 멍하니 그 형제님이 지나간 자리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신앙이란 눈을 뜨고 있어도 막막한 삶의 길에서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가이드와 비슷한 존재인지 모른다. 눈을 뜨고 많은 것을 보고 듣기에 그만큼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에도 깊은 반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많은 지식도 때로는 교만으로 변할 수 있고, 깊은 지혜도 때로는 교활으로 변모할 수 있음에 우리가 진정을 바라야 하는 것이 지식도 지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서 얼마나 부끄러워졌는지... 너무도 긴 길을 가야하는 인생에서 우리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어떤 일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 기쁘게 할지 모르는 것이 바로 삶이다.
힘든 일에 쉽게 슬퍼하며 낙담하여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기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하면서... 좋은 일에 쉽게 흥분하며 감사하지 못하며 들뜬 감정만을 챙기면서 좋은일에 대한 역치가 올라가면서... 그렇기에 우리는 너무도 감사함을 모르고 살았다. 좋은 일엔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힘든 일엔 그 힘든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하느님이 큰 계획으로 단련시키고 있다고 감사할 수 있지만... 우리는 좋은 일에 대한 감사의 방법만을... 아니 이제는 좋은 일에 대한 감사의 의미마저 퇴색해 당연함으로 생각하기 쉬운 우리가 되어버린지 모른다. 비록 앞으로 볼 수 있고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지만 사실 끝없이 이어지는 광야에 서있는 눈뜬 장님과 다른 바 없다. 그 넓은 광야에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갈 수 있음을... 우리 스스로를 너무 자만하고 교만하지 않음이 필요하다. 믿어보자... 이유를 물으면서 믿는다면 그 이유가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결국 믿지 않을 것인가? 아무 이유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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