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깔끄럽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몇가지
원준이 생각 2011/12/03 22:54⑴ 내 종교가 소중하다면 다른이의 종교도 소중하다.
⑵ 믿음과 신뢰의 영역 - 종교는 자판기가 아니다.
⑶ 신앙인이 마지막까지 붙잡을 수 있는 건 사랑하나 뿐이길...
⑷ 십자가
⑸ 기적이 있나요?
'종교'에 해당되는 글 4건종교, 깔끄럽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몇가지원준이 생각 2011/12/03 22:54
요즘 종교에 드는 나의 생각들을 모아서...
⑴ 내 종교가 소중하다면 다른이의 종교도 소중하다.
간혹 종교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가능하면 종교는 신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같은 종교가 아니면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안할려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종교가 '더 좋다' , '더 옳다' 를 이야기하는 것은 뭐라 하기 싫은데 그런 와중에 자신의 종교가 더 좋은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너의 종교는 이래서 틀리고 저래서 틀리고' 라며 이야기 시작한다. 특히 내가 아는 사람중에 당신의 종교를 믿는 사람 누구는... 특정 인물을 비판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판단하지 말라는 종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통해 상대방을 판단한다. 자신의 종교가 좋다를 이야기하지 왜 상대방의 종교가 틀리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신의 종교가 진리이고 확실하다고 믿음에 가득 찬 사람들만큼 교만에 가깝지 않은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비단 이는 소위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종교도 결국 인간의 믿음이다. 굳고 강한 강철일수록 강한 충격에 한번에 잘라지고 연하고 무른 강철일수록 그만큼 변형되기 쉽듯이 우리의 신앙도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충격에 쉽게 끊어지기도 때로는 너무도 나약하게 변형되기 쉬운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종교의 당위성을 도덕적 의무감으로 변질해 누군가에게 부과한다면 결국 종교는 '신'만이 믿을 수 있는 종교가 되어버릴 것이다.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보살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종교의 첫번째 가르침이 사랑이라면 말이다.
겸손의 옷을 입은 사람은 결코 종교를 무기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을 것이다.
⑵ 믿음과 신뢰의 영역 - 종교는 자판기가 아니다.
어디서 본 건지 기억은 안나지만 믿음과 신뢰란 단어를 한꺼번에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잠시동안 두가지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두가지가 어떤 의미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지만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뢰(信賴)란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처럼 믿고 의지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가 더 강할 것이다. 그래서 비지니스에서 믿음이라는 말보다는 신뢰라는 말을 더 어색하지 않게 쓰는 것이고 연인 관계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으로 이어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뢰라는 말은 조금 어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상호 이해관계가 섞여 있는 성격은 신뢰라는 말이 더 쉽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호 관계성을 강조함에 따라서 그 신뢰의 바탕은 막연한 대상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s)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금융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즉, 현재의 내용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게이지(gauge)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쉽게 신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Trust in God 란 말은 영어 문화권에서 사용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는 신뢰(credit)이란 뜻이 아니라 (sincerity in belief)란 말로 오히려 믿음 중에 조건없는 믿음(unconditional belief)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강하다. 우리가 신을 믿는 한 신은 우리에게 자동판매기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뽑아 주지 않는다. 자판기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물건을 내어 준다면 그런 신뢰없는 자판기를 더이상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청원하는 것들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더이상 내가 바라던 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종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뢰는 그만큼 상호 관계성과 함께 그 상호 관계 안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예상을 기반으로 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본인이 원하는 모습의 신이 아니라도 불가능하고 내 인지력의 이상(beyond recognition)이라 할지라도 신은 신뢰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비록 내게 나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내가 받는다 할지라도, 고통, 아픔, 슬픔, 그 어떤 것이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얻는다 해도 지키는 것이 믿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⑶ 신앙인이 마지막까지 붙잡을 수 있는 건 사랑하나 뿐이길...
상상해보아라...
만약 누군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돈을 원해 부자가 되어도 전쟁이 일어나 돈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고
명예를 원해 높은 자리에 올라도 누군가의 시기로 죽음을 당할 수 있고
그 어떤것이든 인간이 만든 자리와 인간이 만든 물건 을 원한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희미하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사랑'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살인자의 마지막 순간에도 어쩌면 어머니의 사랑이 있을 것이고 어머니마저 잊혀버린 사람이라도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연민이 있을 것이고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 안에서 마지막 순간이 있다하더라도 그 어딘가 혹시나 모르는 자비의 마음이 그를 향할 것입니다.
⑷ 십자가
가족이 짐스럽고 힘들고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생각은 정말 죄일 것이다. 내가 힘든만큼 가족들은 오죽할까 그리고 그 삶의 힘든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언제인가 신부님이 고난의 세가지 모습을 설명해주셨다. 자신의 길이 바른 길이 아닐 때 가이드 같은 훈육, 자신의 성장을 위한 통고 그리고 세번째가 십자가라고... 그 십자가를 버리는 순간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보며 예수님의 제자라 불리워지게 된다고...
그런 명예로움이나 영광스러움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가족이 행복할 때 나또한 "자유롭게" 행복할 수 있음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나 혼자라면 느끼지 못하겠지만 내 곁에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어 내 십자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모두들 피하고 싶은 그 고난과 고통안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⑸ 기적이 있나요?
천주교를 믿는 이 중에 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앙에 대한 자긍심도 있고 스스로 천주교를 믿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어떤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자신이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에 대해 듣곤 했다.
기도를 하던 중 '초 자연적'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났거나,
꿈 속에서 예수님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거나 하는 등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일상의 삶은 불평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불만족, 때로는 자신의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의 탓으로 돌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 또한 종종 듣게 되었다.
종교인으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을 무척이나 '선택받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그 자매님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일상이 기적이고 신비로운 매 순간임은 잊어버리고 왜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려고 할까...? 그런 묘한 감정이 쌓였을 때 신부님의 주일 강론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신이 주는 기적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의미있게 신의 표징이 되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번째는 매일의 삶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두번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 얼마나 큰 신비로움과 감사함으로 아직도 내가 살아있는지 정말 '살아 숨시는 매 순간이 기적임'을 느껴야 겠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원준이 생각 2011/09/19 05:16아무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인식
그러나 그것을 한계라 생각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발전한다.
겸손을 가진 발전은 그래서 사람들을 아름답게 살게한다.
죽음의 결정은 내가 할수 없다는 유한에 대한 인식
그러나 그것을 유한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성으로 희망한다.
숙명을 가진 이별은 그래서 사람들을 아름답게 죽게한다.
할 수 없음에 안타가워 해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할 수 있음에 자만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음은...
유한한 삶에 대한 겸손함과
죽음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교체해 흐르는 그 교차점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감한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이 준 선물원준이 생각 2009/02/02 01:19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와 반대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이야기 속에서 다양한 이유를 접할 수 있지만 참 신기한 점은 다음과 같은 점이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그것은 결국 자신이 경험하고 받아들이 가치관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심한 고통 속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심한 고통을 인간에게 준다면 그것은 신이 없을 것이라는 증거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즉, 같은 현상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각자의 다른 이야기와 이유를 통해서 신을 부정하고 신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이다. 용산 참사를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이질적인 삶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이는 이렇게 외친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비극을 만들었을까?" 참 간단한 물음이다. 신이란 일반적으로 항상 선(善)하고 옳바른 정의의 편에서 서는 그런 수호자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야기로 놓고 본다면 이런 상황에서 외치는 신이란 비극적인 현실에서 다가오는 그 참혹함과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해결될 수 없기에 대신 이 세상을 한탄하게 만드는 하소연의 대리인 성격이 더 강할 것이다. 난 신이 존재한다고 기본적으로 믿고 있다. 어느날 역사학자가 역사적 고증을 통하여 예수님은 다 꾸며진 이야기이고 그 꾸며진 이야기 속에서 이룩되어진 교회를 믿는 것도 근거가 없다고 누군가 주장하고 공격한다면 정말로 충격과 심한 혼돈 속에서 지내게 될 것일까? 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성과 신학의 안정성은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죽음, 십자가의 형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근간을 통한 신학이 우리 일반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마저 갑자기 뽑아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롭고 정의로움이 결국에 웃음을 얻어내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귀결된다는 믿음을 주고 그러한 믿음이 극도의 악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심이라는 작용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사회는 적어도 훈훈한 인간의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난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중에 하나는 정의(Definition)되지 않은 선에 대한 기준이라는 점이다. 그 선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신비한 작용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어떤 행동적 규범으로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대교의 율법이나 강력한 종교의 가르침과 규율은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이자 반대로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예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율법과 규율이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종교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가톨릭의 교리안에서는 말이다. 가톨릭 안에서도 많은 규율과 규범이 존재하게 된다. 주일엔 미사에 참여해야 하며 일년에 두번 이상은 고백성사를 보아야 하는 등의 다소 귀찮고 까다로와 보이는 그런 많은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규율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도 관대하기도 하다. 신에 대한 예의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왜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오면 (회계하면) 된다는 단서를 통해서 인간의 잘못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규제하고 억압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에 대한 많은 갈등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가지는 갈등과 자유 의지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정립은 그만큼 중요하다. 종교가 아닌 다양한 논리와 강한 신념을 통한 가치관의 성립에 대해서 누가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형성과정과 그 가치관의 증명은 때로는 이기지 못한 심한 좌절감과 패배감을 줄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무엇이 인간에게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는지에 대한 짧은 소개를 하는 것을 난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그래서 어린 시절 종교에 대한 다소 강제적인 배움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는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제공해준다.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 놀 수 있는 공간, 같이 느낄 수 있는 기회 등을 통해 그리고 그 안에서 규범같이 느껴지는 종교의 규율성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이나 의지가 때로는 꺾어야도 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때문에 그 범주의 굴레 속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갈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한때 그런 종교의 교육성과 신의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모순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이 고통을 느낄만큰 갈등과 심한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그 반대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신에 대한 존재론적 논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1) 신이 존재한다. 2) 신은 사랑이다. 3) 신은 인간이 행복해지고 평화롭기를 바란다. 4) 현실은 고통과 불평등과 약자는 항상 당하기만 한다. 5) 고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름 논리적인 이 과정을 통해서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이상과 신의 기능을 나름대로 정의하게 된다. 모순적인 결론이지만 난 신이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정의(definition)되지 않은 정의(justice)'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현실이다.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신의 기능성으로 나타나지는 이 세상의 평화와 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얻을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쉬운 인지 과정이다. 신은 인간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게시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안타갑게도 그러한 특별한 기적의 기능성은 그리 길지도 생각보다 효과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기적은 이 일상의 소소한 작은 느낌에서도 다가온다는 것은 이미 신의 기능성에도 별로 불만이 없는 상황이다. 우리가 숨이 붙어 살아갈 수 있는 확률적인 계산이 그리 높아보여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적의 소소함은 우리가 감사라는 기능으로 보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신의 소소한 숨결의 기능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은 우리에게 무엇이 선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지만 무엇이 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양한 예시를 주는 것이다. 만약 신이 정의된 정의를 우리에게 주었다면 우리는 참 쉬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의에 부합되지 않으면 부합되게 노력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방향은 때로 원대한 선의 기능으로 우리가 믿고 가도 남에게 뜻하지 않은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신이 주신 탈렌트(talent)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신비한 능력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능력을 어떻게 쓰고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가의 문제는 바로 자신의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만약 정말 정의된 선에 의해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좀 다른 의미로 부여되었을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자유의지로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신을 부정할 수 있는 의지까지도 허용하신 점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인간은 다양한 가치관과 가치의 혼재와 타협을 통해서 선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삶을 비추어 성찰이 필요성은 이러한 다양한 가치의 혼재에 근거를 두게 될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랑하고 그 결과에 대한 냉혹한 심판보다는 스스로 회계할 수 있는 기회까지 부여하셨기에 인간은 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두고서라도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이 선에 대한 기준을 부여했다면 인간의 고민은 간단하다. 기준에 부합되느냐 안 되느냐이다. 그러나 신은 그 기능을 포기(?)하여 더욱 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인생을 만들었던 것이다. 살인하다 / 도와주다 / 잠자다 / 사랑하다 / 행복하다 / 놀다 위에 제시된 단어중에 인간의 선함을 나타내는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도와준다는 의미만 놓고 보면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통해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챙길려고 하는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러한 예들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행동에 대해서 착하다 나쁘다 판단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원론적으로 보았을 때 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선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행동했느냐 하지 안했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그렇기에 개인의 가치관은 행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행동 그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하다. 우리 사회에서 선의 기준은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선뿐만 아니라 논리, 이성적인 행동의 기준은 바로 자본이 되어버렸다. 자본의 논리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자신의 건물의 세들어 살던 세입자들이 내 몰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얘기한다.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에겐 돈을 더 줄 이유가 없다고... 그래서 용산의 참혹한 현실은 우리에게 참 안타가우면서도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참혹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오히려 인간의 세상은 명확해지는 기준이 존재하면 할 수록 다양성은 왜곡되고 인간미에 근거해서 받아들이긴 힘든데 받아들여야 하는 안타가운 현실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요즘 아이들의 기준은 명확하다. 자신의 미래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떤 아이들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 아이들에겐 간단한 삶이다.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길에 포함되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목숨도 쉽게 포기해버릴 수 있는 잘못된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신이 인간을 참 많이 사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지전능하시기에 이렇게 해 명령을 내리면 신을 믿는 자들이야 기꺼이 따를 것이고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야 따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으니깐 잘못되어도 "거봐라.." 하면서 소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더 쉽게 이룰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기준과 기호에 부합되는 인간의 사랑보다 신이 얘기하는 사랑의 향기는 더욱 더 힘들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하는 땀의 냄새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너무도 사랑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여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 그것이 자본의 논리로 인간의 인성과 인권이 무너지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가 지켜야 하고 전해야 하는 강한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사람들 생각 2009/01/02 16:19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라. 함께 내 교법(敎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육신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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