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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1/22 세상에 상처와 이별이 있는 이유는...
  2. 2011/08/17 사람의 얼굴을 읽지 마세요.
  3. 2011/07/18 시선에서 자유로와지기
  4. 2011/06/10 지적장애우가 되고 싶다.
  5. 2009/06/19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세상에 상처와 이별이 있는 이유는...

원준이 생각 2011/11/22 21:54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는다. - http://v.meson.kr/mbn2GX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말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부족함을 표현할 것이다. 

◈ 첫번째 에피소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도 힘들게 보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이 해야하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하는 것들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 늘 사람들로 부터 사교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큼 쾌활하고 유쾌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래서 그 사람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인상도 그늘 진 모습보다는 유쾌함에 묻어 나오는 선입견인지 사람들에게 호감을 더 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밝은 모습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 부터 상처도 많았다. 그 사람에게 그 상처는 항상 이겨야 하는 대상이었다. 어떤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솔찍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고백을 통해서 자신 만이 가지고 있는 짐이 덜어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아왔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두통에 필요한 진통제를 먹듯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위로를 받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큰 상처나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뭔가 풀리지 않는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 마치 진통제를 먹어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두통에 소화제를 먹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받지 못하면 그 관계의 본질이 이루어지지 않는 느낌으로 자신의 주변엔 자신보다 상처가 덜하다고 생각하거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을 모으게 된다. 


◈ 두번째 에피소드 

사람간의 이별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별이라도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별에 있어 그 이유가 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고의 현장에 아버지가 그 시간 그 곳에 있을 이유까지 찾을 수는 없다. 이미 끝나버린 이별에 매달리며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찾으려고 말이다. 연인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차이든(dumped), 차든(dumping) 항상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별의 이유라고 찾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를 하면서 과거의 상대방을 평가하며 상대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자신은 항상 옳은 판단과 행동을 하면서 살았지만 상대방이 모든 원인 제공을 했고 나는 참을만큼 참아보았고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라며 그 이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이별이 비참해지고 누군가 물어보는 '왜 이별했어?'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것 같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나는 이별을 통해서 성숙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며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위로와 감정의 동감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진실했고 그 진실의 반대편에 상대방은 항상 진실하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때는 다 이해했던 구체적인 행동들을 꺼내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하다. 상식이하라며 자신의 심미적 감정의 기준을 대어 하나하나 판단하며 그 큰 맥락이 결국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라 이별이 생긴거라 이야기 한다.




 
... 상처를 받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변명일 수 없다. 


스스로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본질적인 상처를 꺼내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대부분 상처를 받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과거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뿐이다. 그 누구도 나의 상처를 다른 이에게 완전히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부모의 학대를 받은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모여도 그 상처는 사람 수만큼 다르다. 아마도 같은 부모의 학대를 받은 형제남매라 할지라도 다를 것이다. 그만큼 사람은 상처에 대한 각기 다른 수용과 감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A 라는 아이는 그 상황을 탓하며 자신의 방이 없어 공부할 수 없음을 상처라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 B 라는 아이는 자신의 방이 없기 때문에 가족들과 살겹게 보낼 수 있다는 행복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상처란 절대적으로 이것이 상처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는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의 빗장을 열기 전에는 상처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넌 왜이리 못생겼어'라는 말 자체가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 들여 '내가 못생겼다' 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상처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로 잠시 넘어와서 자신의 상처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크게 두가지의 유형이 보인다. 첫번째는 그 상처를 통해 상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그 반대편엔 자신의 상처를 좀더 들어달라는 더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무리 힘든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이것이 상처다 저것이 상처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자는 자신의 상처와 항상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판단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대방이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해도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며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상처에 대한 비교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 남에게 상처주면서도 '나도 이정도 상처 안에서 살았는데...' 라며 남에게 쉽게 상처주곤 한다. 

이야기의 패턴은 항상 비슷하다. ① 나는 이런 상처를 받았다. ② 나름 많은 고민과 노력으로 성장하였다. ③ 다른 이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비교 분석한다. 상처는 치유하고 내적 성장을 위해 존재할지 모른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이해하라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남의 상처를 비교하고 판단하는데 사용한다면 그 상처는 하나의 독이 될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어야지 판단의 근거가 되서는 안될 것이다. 


... 자신의 진실함을 핑계로 상대방의 순수성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다. 


배려란 참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만나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두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둘 모두 자신의 이야기하지 못하고 참아오거나 두번째는 정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경우. 둘 모두 그리 정상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만난다는 것은 그래도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상대방을 통해서 나와 서로의 관계를 찾아가는 하나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시작은 그러한 서로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런 접점을 찾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사실 이별의 시작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든, 성격적인 이유든, 그 이유는 그냥 이별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일 뿐이지 대부분 자신이 기대치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클 것이다. 그 구체적인 항목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별또한 아픔이고 상처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헤어지고 서로가 남이 된 상황에서 가장 재밌는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상당히 객관적인 자신을 설정하고 이별의 이야기를 자신의 주변에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별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항상 진실해왔으며 상대방에 대한 상황과 행동을 자신의 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동의를 구한다. 나는 진실했고 여러가지 상황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사람 그때 그런 행동들은 정말 인간 이하의 행동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며 자신이 이별의 당연함에 동의를 구하게 된다.

대부분 자신의 행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에 맞춰 상대방을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고 그 대부분의 결론은 상대방은 원래 진실하지 못했고 상대방은 순수하지 못하다를 결론낸다. 그렇게 나쁜 경험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동정과 연민을 얻어내면 자신의 마음이 수월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런 소모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만남에서 자신은 진실하고 상대방의 순수성은 더럽히는 것이 자신이 이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노력한 내용들에 대해서 부연설명하며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순수성을 판단하면서 자신이 순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만에 가깝다. 이별의 순간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성찰만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착하고 진실하게 되기 위해 지나간 인연에 대해 순수하지 못함을 가쉽하는 그 행동은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찰은 토론이 아니다. 누군가의 동의가 이별에서 자신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외치면, 그 어떤 만남에서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을까. 이별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만남의 해소일 뿐이다.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이별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면 몇번의 상처와 이별을 통해서도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 판단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바라보는 기준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결국 몇번이고 실패라는 냉소만 쌓이고 고요함 안에서의 자신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동의만을 통해 잠시 아픔을 잊게 하는 진통제만을 먹는 효과일 뿐이다. 

자신의 상처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주며 다른이의 상처를 판단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하며 다른이의 영혼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묘하게 재미있는 교차점을 가진다. 그것은 침묵 안에서 들릴 수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듯 하지만 결국 다른 이를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많아도 다른 이를 위한 배려는 배우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이런  모습들을 지우기 위해 성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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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을 읽지 마세요.

원준이 생각 2011/08/17 17:41
심리학자 그리고 의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의 즐거운 표정, 행복한 표정에 대한 판단은 쉽게 내리지만 사람의 좋지 않은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은 쉽게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표정과 좋지 않은 감정이 섞인 부분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감정을 표정이나 카메라를 통해서 알아낸다는 것은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과학적일 수 있지만 현실적 혹은 실용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은 다양한 표정을 상황에 따라서 감출 수 있고 비록 감출려고 하는 연습이 서툴러서 제대로 표정이 안나왔을 때도 상당히 애매한 얼굴 표정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래 같이 살아오고 다양한 감정을 같이 공유한 사람이야 상대방에 대한 표정을 그래도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반응때문이다. 즉, 사람들마다 정확하게 같은 자극이라고 하더라도 그 반응의 차이와 방법은 다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전화, 인터넷 등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 대면하며 이야기하는 동안은 상대방의 얼굴 표정과 자신이 이야기 하는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전화 (물론 화상통화 제외) 를 비롯한 메세지, 메신저 등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전혀 보지 않은 체 대화해야 한다.  

판단이 곧 불행의 시작이라면 하고 싶은가? 


사람들은 자신의 대화 특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사람에게 더 민감하다. 상대방의 메세지 하나, 목소리 톤, 손짓 발짓부터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상대방이 어떤 감정이구나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심리적으로는 당연하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어떤지 살피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자신이 방어해야할 부분이 혹시나 있을까 하는 방어적이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엉덩이에 염증이 나서 불편한 자리때문에 찡그린 얼굴에도 혹시 내가 잘못 말했나 걱정해야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혀 감정적 반응도 안 보이는 문자 메세지도 몇번을 살피며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감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하고 자신에게서 해결이 안되면 수많은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지인들을 불러 자신의 문자를 보여주며 정답을 찾을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봤자 사실 불안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바로 본인 스스로이다. 사람의 관계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위해 그렇게 살피고 상대방의 얼굴을 읽지만 대부분 관계의 잘못이나 어긋남은 이런 잘못된 '얼굴 읽기(face reading)'의 단계에서 찾아온다는 사실도 재밌다. 우리가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헤어진 이야기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상대방을 이야기할 때 결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은 마치 나쁜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상대방인 듯 상당히 상세히 설명한다는 점이다. 즉, 이야기만 듣고 보면 상대방이 정확하게 절제된 단조로운 하나의 감정, 예를 들어 분노, 짜증, 미움 등의 형태를 잘 표현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은 당연하다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들을 때 나는 항상 물어본다. 상대방이 그런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한적 있냐? 그럼 대부분은 얼굴에서 보인다. 그의 행동에서 보인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감정의 표현이 잘 나타나 모두가 공감하는 상태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얼굴 표정이나 상당히 애매한 상황에서의 감정을 포착하여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http://blog.meson.kr/188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된 판단의 대부분은 정말로 사소하고 말도 안되는 것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스스로 불행의 길을 걸을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뭐 먹으러 갈까?"  
"응 아무거나..." (평소 잘 결정을 못하는 성격이고 이 날따라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 
"아무거나? 나랑 만나는데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거야? 그리고 왜이리 짜증내면서 이야기해" 

짜증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몰라도 사실 짜증을 읽어내는 사람의 기분과 기준에 따라 그 짜증의 정도는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가능한 얼굴에서 그리고 심지어 문자 메세지 등에서 상대방을 읽지 않도록 하면 어떨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외부 요소는 상당히 많다. 상대방이 얼굴이 안 좋은 이유는 당신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 

사람마다 감정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그렇게 읽은 감정이 별로 정확하지도 않다. 본인은 정확하다 확신한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확신은 결국 나중엔 불신을 위한 확신으로 진화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만 더 안좋아진다. 행복하고 싶으면 차라리 그 얼굴을 잊어버리자. 그래서 행복한 얼굴의 상대방 사진을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우리의 판단력은 자신이 믿고 이미 결정내린 사안들을 지지해줄 증거들을 수집하는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객관적 판단력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들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할려고 하고 옳은 일이다 잘못된 일이다 에 대한 판단을 먼저하자는 것이다. 소위 신념과 정의의 관점에서의 판단은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상대방을 읽고 상대방의 의도를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의 얼굴을 숨기기 or 보여주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런 표현을 해야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아니... 내 말은 내 뜻은 그런게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예절과 예의의 기준은 상당히 높고 까다로우면서 자신이 하는 이야기와 감정의 표현은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한 표현을 이야기해도 말꼬리의 높낮이 목소리의 높이, 톤 등을 고려해서 종합적 판단으로 상대방은 나를 미워한다 자주 결론을 내리곤 한다. 재미있는 일이다. 아무리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여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요소가 상대방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상당히 까다롭고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나 다툼의 화근은 대부분 문장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은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들이라는 점이다. 감정이 격해져서 상대방의 호칭을 "야..." 라든지 상대방의 부모를 "너희 부모" 라는 표현으로 정말 별 것 아니고 이해해주면 될 것 같은 요소들도 상대방의 귀엔 거슬리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문제는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전화, 문자, 메신저 등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런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수없이 Shift 키를 누르면서 이모티콘을 난발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능한 가까운 지인이라도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존댓말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감정이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도 있지만 비록 나의 감정이 나쁘다고 해도 일단 진정을 해야한다는 감추기의 기능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전화기나 컴퓨터에 나오는 상대방의 감정은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메세지에서 "아우 짜증나" 하면 짜증난 것은 알지만 그 짜증이 나에게 향한 것인지 아님 다른 사람을 향한건지에 대한 확신을 하기 힘들다. 서로 쉽게 비속어를 사용하는 사이라고 막역하고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감정이 엇갈리면 그때부터 서로에게 비속어를 상다방에게 쓰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이란 사람들과의 관계가 물 흘러가듯 거스름도 없고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얼굴을 읽어도 사실 제대로 읽은 적도 별로 많지 않고 특히 그러한 판단은 대부분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들이고 그런 나쁜 판단은 결국 엉뚱한 상상의 나래로 자신들을 괴롭히게 된다. 

대부분 나의 판단의 기준은 편협하고 너르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런 속 좁은 마음에서 다른 이들의 얼굴을 열심히 읽어도 나에게 평화를 주는 판단은 거의 없없다. 오히려 이러한 판단을 하려는 마음이 강해질 때 바꾸어 생각해보자 다른 이들도 나보다 너그럽지 못할 것 같다면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통신 생활이나 언어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신선한 미소를 줄 수 있는지 노력해 보는 것이 좋지 않알까? 

개인적으로는 호감이 안가지만 노홍철의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에는 어느정도 동감이다. 너무 과도하거나 부적절하게 웃으면 그건 분명 미친 놈 취급 혹은 비웃는다 판단이 들겠지만 최소한 평소 생활의 미소는 어두운 얼굴과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상대방에게 불편한 판단, 얼굴 읽기를 덜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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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에서 자유로와지기

원준이 생각 2011/07/18 18:47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며 살아왔다. 그다지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 자부할 수 없기에 그런 시선들과 평가들이 무섭고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순간 그런 시선에 대해 신경쓰기 시작하면서 결국 가장 힘들어지는 사람이 나 스스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안에서의 두려움과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해결책 없는 걱정에 잠 못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을 느끼게 된 것 같다.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대학때도 학교가 가까워 재밌게 지내는 이성 친구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어느 날 학교 식당으로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예전에 자신이 미국에서 사온 인형을 가지고 나와달라고 했다. 아무런 걱정없이 다음 날 학교 식당에서 만난 그 사람은 이유도 영문도 모른 체 그 인형을 준비한 가위로 싹둑 싹둑 잘라버리고는 "너는 이 선물 받을 자격없어" 라는 말과 함께 그냥 가버렸다.

너무도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이유도 알지 못하고 그냥 "받을 자격없다는" 통보만을 받고는 그렇게 연락이 끊겼던 것이다. 사실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 이후에도 그 일을 회자하면서 도대체 무엇이 이유일까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상담해 보아도 수많은 추측만 난무할 뿐이지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뿐이라는 점이다. 사실 몇년이 지나 공석에서 그 친구를 만날 기회는 있었지만 인형을 자르는 그 영상은 마치 반복되듯 내 머리에 남아서 그 친구 앞에서 계속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소심해진 내 마음의 벽때문에 그냥 물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가끔 그 이유가 궁금하면서도 잊은 듯 지내왔었다. 그러나 요즘에 들어 그 사건이후 얼마나 내가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시선과 반응에 혼자 힘들어하며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소심한 나로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그랬다는 소문 뿐만 아니라 별로 의미두지 않아도 되는 상대방의 시선과 태도를 생각하면서 내 스스로 여러가지 방어적인 추측을 가득하게 되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러한 방어적인 추측들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지 한숨이 나오곤 한다.

몇년 후 사귀게 된 외국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멀리 떨어져 있고 가치관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다투기도 하였지만 매일 안부를 묻고 잘 지내고 있었지만 어느 날 여자친구의 지인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하고 결국 어느 시점에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소문이나 가쉽에 항상  걱정하며 두려워하면서 살았던 내 소심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리는 가쉽은 마음을 스스로 힘들게 만들었고 그런 가쉽을 만들어내는 채터 혹은 가쉽퍼의 일방적인 혹은 과장된 내용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웃긴 사실은 그 반대로 여자친구에도 수많은 이간질과 저질스러운 블랙메일을 내가 보낸 것처럼 만들어서는 결국 나를 경찰서 조사까지 받게 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정을 정리하고 있어서 확실한 알리바이와 시스템 로그 분석으로 그 메일이 내가 보낸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해결은 했지만 더욱 더 진실에서 벗어난 그런 가쉽과 이간질로 내 스스로가 얼마나 속박되어 살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원망스러운 부분은 왜 미리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데... 라는 연락을 주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상해서 보낸 확인 메일이나 전화에도 제대로 대꾸조차 안하고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쓴 상대방을 생각하며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그런 소문과 가쉽에 얼마나 속박되어 살았었을까 하며 원망보다는 그냥 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기로 생각했다.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과 시선에 소극적이기 시작했던 나의 삶 안에서도 그런 대응의 모습은 직접 물어봐서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기보다는 그냥 혼자 추측을 하며 생각하고 그 생각에 어떤 구체적인 대처 방법도 제시하지 못한 체 그냥 속앓이만 하면서 살아왔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생기는 성격이 바로 소문과 남들의 시선, 판단에 민감해지고 나를 나쁘게 말하는 시선에 대해서는 억울함에 호소하며 방어하지만 결코 적극적이지도 않고 어느날 버스 안에서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는 때도 있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가쉽이 왜 같인 사실에 대해서도 꼭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지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적극적으로 잘 했다" 라는 말도 "어디 분위기 모르고 나대냐" 라는 말로 변하고 사실은 존재해도 그 사실에 대한 가쉽이나 시선은 결국 그렇게 남 이야기를 좋아하는 "가쉽퍼"의 기호와 판단으로 왜곡되기 쉬운데도 그 소문의 내용에 더 신경이 쓰이고 그 시선이 퍼지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며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이 두려워서 사람들 앞에서 내 맘대로 춤추고 싶어도 추기 힘들었고 뭔가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하지 못했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군중이 많아지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그 수많은 군중 모두에게 모나지 않는 사람으로 보여야 했고 그 시선의 자체 검열로 인하여 내가 원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서 하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후회한 기억들이 쌓여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요즘도 그런 시선이 결코 맘에 들지 않는다. 교회 활동을 하거나 어떤 사회 생활을 하더라도 부딪치는 사람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시선과 그 사람들이 떠벌릴 수 있는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나에 대한 이야기가 두려웠고 그런 두려움에 결국 내 마음이 이끄는 삶보다는 그들의 시선이 불편하지 않은 모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 들어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나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그러한 시선들 때문이 아니라 그 시선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스스로 감옥을 만들었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인형 사건에서 나는 항상 '내가 어떤 잘못을 했을까'라며 나를 추궁했고 이간질에 의해 경찰서까지 갔다온 이후에도 '내가 무엇을 서운하게 했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고 그리고 내 맘에 안드는 소문들을 만들어 내는 가쉽퍼의 시선엔 그들의 성품을 비난하면서도 내가 정말 그런 모습이 있는건가 하면서 조심스러워지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의 기도를 통해서 느낀 하나의 교훈은 그런 편견과 삐뚫어진 시선을 가지고 소문을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결코 좋은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를 칭찬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의 삐뚫어진 시선과 자신의 욕심어린 편견에 만들어진 가쉽들에 의해 나같이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늘 알 수 없는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남들의 시선이나 편견 그들의 기호에 맞는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올바른 가치관에 신념을 가지고 행동 하나하나 순간 순간 행하는 것이고 혹여나 부끄러운 일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먼길을 돌아서 왔지만 이제는 그 누구의 시선이 두려워서 내 삶을 우회하지 않을거라고 다짐한다. 내 존재의 의미는 그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존재의 의미는 너무 쉽게 무너질 것이다. 내 삶의 기둥은 나 스스로이고 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느끼던 그 시선의 두려움과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 대한 판단, 내 기호에 따라 누군가를 비난하는 굴레에서 탈출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다른 이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 법정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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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우가 되고 싶다.

원준이 생각 2011/06/10 17:08



요즘 신앙인이라고 믿고 있던 내 자신에게도 짜증이 나고 정말 욕을 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가진 소위 상식과 예의의 수준에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들로 스스로 화가 나기도 하고 잊어버리고 다시 상기하고 반복했다. 내가 가진 논리정연함으로 모든 일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던 나에게 집안 거실에서 굴러다니는 흥보물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성 필립보 생태마을의 홍보지였다. 


첫머리에 "지적장애우들이 행복하게 살수있는 공동체..." 라는 부분을 보고 멍하니 멈춰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문구가 맘에 들거나 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지적장애우'라는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지적[지쩍;知的]장애우라고 보였을 그 단어가 나에겐 순간... 

지적[指摘]장애우 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순간 대학생활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페아 아동학교에서 보조교사로 활동하던 시절 어떤 한 아이가 식칼을 잘못 휘둘러 나의 복부를 찔려 손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프기는 했지만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아이가 나의 상처를 보고는 이내 "호...~" 하면서 아프지 말라고 달래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 아이에 대한 원망도 오히려 내가 그 아이에게 어떤 다른 형태의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걱정이 오히려 앞서던 기억이 떠올랐다.

인간은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서 지식을 쌓아야지만 인간으로 마땅한 것이고 그것이 평균의 활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일면 맞는 말이지만 그 많은 지식들 속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말 우주의 티끌보다도 못한 지식의 범주 안에서 새로운 활동을 하게 된다. 그것은 소위... 

지적질이다.

자신이 가진 지식의 한계성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이 전부인 양 들은 것이 전부인양 자신의 편견과 자신의 기호에 맞춰서 남을 지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라며 다른 누군가가 잘못되었다며 지적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번 쉽게 말한 것에 다른 누군가가 상처받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의 지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해 결국 또 반격하고 선악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심지어 신을 믿는 신앙인들도 비슷하다.

그런데 지적[지쩍;知的]장애우들은 그러한 판단을 쉽게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그렇게 판단할만한 충분한 것을 습득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누구를 지적하거나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좋다 나쁘다의 자신의 마음에 따르는 순수한 표현을 기대할 것이다. 그들은 지적[지쩍;知的]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적[指摘]하는 것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적[指摘]장애우들이기도 하다. 

너무 많은 것을 배워서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지적은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변명과 거짓으로 대변하여 적절한 지적엔 대처하지 못하고 다른 이에 대한 과도한 지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우리는 '지적우월자'였던 것이었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것이며 또 아무리 논리적으로 판단해도 얼마나 많은 것을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것을 판단하고 누군가를 지적하고 옳고 그름을 너무도 확실하게 판단했던 나에겐 화나는 것도 마음에 안드는 것도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논리정연하게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지적하고 싶은 내 마음안에서 오래 전에 나에게 육체적 상처를 주었지만 내 마음 속엔 어떠한 앙금도 상처도 남지 않은 그 아이를 떠올리면서 내가 요즘 하고 싶었던 지적질의 마음도 사라지게 하도록 마음 먹었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안될 것 같아서 신에게 "지적하려고 해도 지적하는 법을 몰라 하지 못하는 지적장애우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청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리고 싶어졌다.

내 마음 속의 화, 지적하고 싶은 마음 그 모든 것은 결국 내 욕심의 산물이라 생각하며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내 것이 아닌 것에 내가 아닌 것에 함부로 지적하지 않는 마음을 순수하고 있는 그대로 느끼기만 하는 우리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지적장애우로부터 배우게 된다. 하느님은 바로 그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시대 물들어 지적하며 사는 우리들을 반성하도록 내려주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무도 고맙게도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고 지적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지식마저도 내려놓아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 난 지적[指摘]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지적장애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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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원준이 생각 2009/06/19 02:43
우리는 죄의 경감을 옹호할 만한 증언을 통상적으로 무시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확신한 후에
그에 위배되는 증거들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진리라고 불릴 만한 것 중에서 이런 식으로 도출된 진리는 없다.
- 마릴린 로빈슨, 「아담의 죽음」

사람들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일단 판단을 하고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살아온 길, 그 사람이 말하는 태도, 그 사람이 행동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요소들을 판단하게 된다.


"저렇게 말하는 것 보니 저 사람은 무척이나 무례한 사람이야"

"저런 양복을 입는 것을 보니깐 꽤 사는 사람인가 보네" ... etc...

수많은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판단하고 그 판단의 근거를 살펴보기보다는 그 판단은 곧 바로 다른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재밌는 부분은..

① 이차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는 판단이 정말 사실인가?
② 이차적인 판단에 반대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은가?
③ 감정적인 판단에 의한 일반화의 오류는 존재하지 않는가?

CASE) 연인 사이인 영숙이와 영달이는 오랜 기간 교재해온 사이이다. 같은 학교 캠퍼스 커플인 둘은 좋을 때는 서로 없으면 안될 정도로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로 알고 싶고 서로가 무엇하는지 궁금해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이였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즐거운 것을 함께 하는 그런 사이였다.

어느날 캠퍼스에서 혼자 걷고 있는 영숙이에게 돌팔이라는 학생이 영숙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쫓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잠시 시간을 내달라는 돌팔은 영숙의 앞을 가로 막았고 그 순간을 멀리서 우연히 보게 된 영달이는 멀리서 영숙과 돌팔이 서로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를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영숙이가 어떻게 저렇게 "웃는 얼굴로" 모르는 사람에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 "저 사람 영숙이랑 무슨 관계이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영달이는 자신이 보는 모습중에서 자신이 순간 느꼈던 가장 기억이 나는 판단을 떠올리게 된다.
"웃는 얼굴로"

웃는 얼굴을 기본으로 영달이는 영숙이를 정의하기 시작한다. "영숙이는 낯선 남자에게도 잘 웃어주는 여자구나"

그 이후에 영숙이와 영달이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영숙이는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 영달이 친구 순돌이가 하는 얘기에 흥미를 느껴 잠시 집중을 하게 되었다. 영숙이가 흥미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했고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집중하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영달이는 또 판단하게 된다.

"아니 어떻게 남자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나에게는 관심도 없이 저렇게 낯선 남자에게 집중하면 있을 수 있는거야?" 그러면서 순간 예전의 판단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논리와 판단을 확장시킨다. "낮선 남자에게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는 아이가 바로 영숙이였지..." 원래 저런 아이니깐 저런 모습도 당연한거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술자리 이후 데려다 주면서도 영숙이에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고 예전같은 모습을 안 보이는 영달이가 이상해 영숙이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 영달은 자기 잘못도 모르면서 저렇게 태연한지 원래 그런 여자임에 틀림없다 확신하게 된다.

그러다 의심은 심해지고 전화를 받지 않거나 집에 늦게 들어가는 영숙을 보면서 낯선 남자에게 잘해주듯 다른 남자 만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의 골은 깊어지기만 한다.

처음부터 살펴보면

웃는 얼굴에 대한 사실 여부에 대해서 확인하지 않았으며
(사실은 어이없는 황당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는데...)
낯선 남자에게도 잘 웃어주는 여자라는 인격에 대한 도약적인 판단을 하였으며
(잘 변하지 않는 성격으로 고정화)
개연성이 없는 다른 사건을 기존 잘못된 판단을 통해 보이는 모습은 편협하게 보일 수밖에 없으며
처음부터 잘못된 사실에 대한 더욱 더 강한 확신을 만들게 된다.
결국엔 의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비이성적 비인격적 행동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역설하게 된다.
(잘못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제공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판단은 완벽한가? 충분한 근거와 변할 수 없는 진실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설사 제대로 된 판단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제대로 된 판단을 믿어 서로 관련이 없는 일에서 자신이 보고 싶어하고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증거만을 위한 편견의 안경으로 쓰는 것은 아닌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판단을 해서 실제로 이성친구의 바람피는 것을 찾기도 하지 않냐고... 의심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난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그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마 작은 실수나 의도하지 않은 행동안에서도 의심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중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은) 상대방이 실제로 그러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너 자신이 정말 행복하냐는 것이다."

상대방을 떠나서 의심과 의혹 혹은 자신이 바라보는 나쁜 모습의 상대방을 두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 정말 너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관계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것은 부족함이나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믿음과 신뢰의 안경을 통해서 그 부족함과 실수의 굴레에 속박되어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의심과 판단의 안경으로 바라보면 결국 자신에게 표현하는 서투른 사랑의 표현조차도 자신의 정의에 움직이는 불편한 행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g.) 뜻하지 않은 꽃다발은 분명 바람을 피고 있다는 증거이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판단하며 상대방을 정의하며 그 정의된 Profile 에 맞추어 살아가는지 확인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100의 사람이 100가지 경우가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은 아마도 100,000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 이상 수많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100인의 사람이 그때 가지는 감정, 환경, 그리고 상태에 따라서도 다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만 우리가 취하기 좋은 증거만을 수집하고 기억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적인 수집은 사실 그렇게 호의적인 판단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그 판단은 쉽게 의심의 눈초리와 감정의 상실감을 주기 쉬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은 우리가 분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판단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고 만약 부정적이라면 그건 자신을 위해서라도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영화 Doubt (2008) 에서 아동동성애를 의심하던 수녀님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신부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아동동성애에 시각을 맞추어 결국 확신을 하는 과정을 심리적으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그런 의심을 설득시킬 수 없고 의심으로 힘든 상황에서 강론을 통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느 마을의 두 여인이 앉아서 동네사람 아무개의 흉을 봤답니다. 가십(gossip)을 한거죠. 그냥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의 흉을 봤겠지요. 그런데 두 여인중에 한 사람이 그날밤에 꿈을 꿨는데, 하늘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오더니 검지손가락으로 그 여자를 정확히 가리키는겁니다. 상상해보세요. 하늘에서 큰 손이 내려와 정확히 내 면전에다 대고 가리키는 겁니다. 꿈에서 깨어난 여인은 꿈에 대해서 생각해보다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개 흉본것을 하느님이 아시고 야단을 치러오셨나봐. 그 손은 하느님의 손인가봐.. 여인은 신부님에게 찾아가 고해성사를 합니다. 
"신부님 제가 아무개 흉을 봤는데 꿈에 큰 손이 내려와 저를 비난하듯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저의 죄를 사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부님이 여인의 이야기를 듣더니, 여인에게 숙제를 내 줍니다.
"집에 가서 당신이 베고 잔 그 베게를 들고 지붕위로 올라가서 칼로 베게에 구멍을 내시오. 칼로 베게를 구멍을 낸 후에 다시 내게 오시오."
여인은 신부님이 일러준대로 합니다. 그리고 다시 신부님에게 옵니다. 
여인: 신부님, 신부님이 일러주신대로 베게를 지붕위로 가지고 올라가서 칼로 찢어 구멍을 냈습니다.
신부님: 베게를 찢었다면...무슨 일이 일어났소?
여인: 베겟속 깃털들이 모두 흩어져 날아갔습니다.
신부님: 이제 당신의 죄를 사할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소. 가서 깃털들을 모두 모아다가 그 베게를 다시 채우시오.
여인: 신부님, 그 깃털들을 어떻게 다시 모을수가 있나요 천지사방으로 모두 날아가버렸는것을...
신부님: 네가 한 짓이 바로 그와 같도다! 네 말을 어떻게 되 담을수가 있겠느냐! 네 죄를 어떻게 씻을수가 있겠느냐!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그 확신이 당신의 불행을 가져온다고 하여도 당신은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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